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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들...

시절단상 161129

by 숲길로 2016. 11. 29.


역사는 언제나 소급 결정된다. 진실을 재구성하는 사건들의 역동 속에서 영원한 팩트는 없다. 돌아보는 그림자는 늘 다른 모습이며, 범람하는 물길은 매번 다른 길을 따라 흐른다. 굴곡진 지형을 휩쓸고 가는 빛줄기는 숨어있던 것들을 드러내고 우뚝하던 것들을 가라앉힌다.

 

박근혜 현상을 다시 생각한다. (그 현상이란 최소한의 분별력도 갖추지 못한, 시쳇말로 성찮은 사람’ ‘칠푼이수준의 인물이, 어떤 강제력이나 제도적 결함 없이 충분히 합리적인 국민적 의사결정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었던 헌정사상 전대미문의 추문적 사건을 뜻한다.) 어쩌면 저건 민주주의 작동 과정에 불가피하게 내재한 함정, 혹은 그 작동 구조의 한계지점에 숨어있는 어떤 맹점 같은 것일까? 달리 말해 저 현상은 민주주의의 논리적 대립물이 아니라(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다수결의 합리성에 기반한 형식 민주주의의 믿음이 끝내 조우할 수밖에 없는 어떤 어둠의 심장(비합리적 핵심), 민주주의 자체의 선험적 오점으로 아로새겨진 지울 수 없는 어떤 얼룩같은 것이 아닐까...? 혹시 그렇다면, 마침내 올 것이 왔다, 라고 해야 할까? (물론 이건 그냥 씁쓸한 헛소리다.)

 

박근혜와 촛불거리는 이 나라 정치세력들의 트라우마다. 보수에겐 촛불의 거리가, 진보에겐 박근혜가 트라우마다. 지금 우리는 이십수년 주기로 반복되는 - 1960(4.19) 1987(6.10) 그리고 2016 - 한국민주주의의 태생적 기원의 장면을 마주하고 있다. (민주주의란 어쩌면 겉만 번드르르한 자기복제 시스템일 뿐인가? 그렇다 해도 그 아래 깊이 가라앉은 시원적 침전물 혹은 불가해한 사물성이 있지 않은가? 표면에 비치는 그 물의 이미지에 우리는 숙명적으로 사로잡힌다.) 촛불로 채워지는 거리는 법치로 구현되는 형식민주주의의 외설적 핵심이자 선험적 과잉일 것인 바, 저 평화로운 혼돈과 분노의 일렁임은 교착에 빠진 상징체계를 근간에서 허물며 어떤 새로운 기원을 열어내는 원초적 장면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아니, 다만 그 이벤트적 재현일 뿐인가?) ‘욕망은 요구의 순수형식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촛불광장은 민주주의의 선험적 순수형식이며 그 촛불이 가리키는 장차의 법질서는 민주주의의 구성적 대리물이 될 것이다.

 

한국현대사에서 큰타자 혹은 아비라 불릴만한 존재는 둘이다. 박정희 그리고 노무현.

보수의 원초적 아비가 박정희라면, 노무현은 그 아비의 살해자(오이디푸스?)인 동시에, 살해된 아비를 대체할 진보의 새로운 아비로 등장했다. 엄청나게 극적이었던 그 등장 방식은 이제 더 이상 한국정치사의 추문이 아니라 신화라 할만하다.

박정희의 환상 구조 속에서 최태민=최순실의 주술에 의해 박근혜란 아바타가 창조되었음은 가혹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다. 아직 우리는 악명높은 유신헌법의 초안자 김기춘과 혹세무민의 주술사 최태민 같은 이름들에 드리워진 어둠의 깊이를 다 가늠하지도 못한다. ‘목에 걸린 뼈가 되어버린 그 이름들은 민주주의란 완고한 상징의 체계를 핵심으로부터 유린하며, 우리를 더 이상의 상징화가 불가능한 공허의 사막으로 내동댕이친다. ‘거리는 그 사막의 현현인 동시에 또다른 상징체계를 찾아헤매는 꿈과 상상의 마당이다.  

아비를 구하기 위해 나섰던 박근혜는 도리어 아비의 확실한 순장조殉葬組가 되어버렸다. 죽었으되 죽지 못한 아비를 다시 묻으며 그 자신도 따라 묻혀야 할 처지에 놓였다. -죽음이었던 아비를 관에 넣고 제손으로 대못을 박고 있는 자식. 어쩌면 그는 비로소, 아비를 죽음의 그 온당한 자리로 돌려보내고 있는 걸까?


그러므로 아직 끝나지 않은 저 모든 이야기는 죽지 못하는 아비들의 이야기다. 대를 이어 전개되는 새로운 에피소드 버전이다.

 

박근혜에겐 진정한 의미에서 상실이 없다. 상실이란 버림=버려짐이며 성인이 되는 통과의례다. 상징적 아비 살해다. 박근혜는 생물학적 어미 아비를 여의면서 영원히 그 시간에 고착되어버린 듯하다. 주체적으로 이루지 못한 아비 살해, 버리지 못한 그들은 영원한 애도의 대상이 되었다. 상실 불가능한 아비에게 욕망을 저당잡힌 댓가로 그는 최태민과 최순실을 얻었다. 두 최씨는 박근혜의 불가능한 욕망이 향했던 바로 그 지점이었고, 거기서 권력과 주술은 격렬히 융합하며 박정희=최태민=최순실이란 환상구도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어둔 과거에 뿌리를 담근 운명의 시간과, 맹렬히 현재를 불태우는 욕망의 시간은 늘 어긋나기 마련이다. 공과 사의 불가해한 뒤엉킴 속에서 기이하게 탈구脫臼된 박근혜의 삶. 최순실은 그 어긋남을 지탱하는 동시에 더욱 폭주시킨 존재였다. 어긋난 틈새로 드러난 것은 어떤 각성된 주체의 형상이 아니라 뿌리없는 권력의 기괴한 민낯. 최순실이 사라진 지금, 박근혜는 텅 비어버린 자다. 더 이상 잘못을 할 능력조차 없다.

 

최태민과의 묵은 관계를 통해 박근혜는 진작 박정희의 외설적 잔재로 판명되었다. 오래 전, 공주의 지위에서 한순간 나락으로 굴러떨어졌던 그는 가장 비천한 무엇이어야 했다.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음에도 끝내 거부하다가 기어이 오물조차 아닌 무엇이 되어버렸다.

행보 하나하나가 주목받는 정치인 문재인의 숙명 또한 박근혜와 비슷해 보인다. 지금까지는 그 역시 박근혜만큼이나 대통령이 자기 운명이라 믿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박근혜의 실패는 바로 그 (누군가의 끊임없는 주술과 자기최면의 결과인) 터무니없는 운명의식에서 비롯되지 않았던가? 현 국면에서 그는 가장 육중한 의미를 지닌 기표지만, 그 위상을 운명으로 고집하는 한 장렬히 침몰할 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

2의 박근혜가 되지 않으려면 그는 실패하여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실패함으로써 열리는 전혀 낯선 주체의 자리, 즉 운명의 중심이면서 스스로 추방되거나 사라지는 자,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될 수 있을 때 그가 추구하는 가치의 성취 가능성은 높아지지 않을까? 아비 노무현의 사라지는 흔적, 외설적 잔여물로서의 운명을 그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의 기표, 심지어 맥거핀(교란하는 미끼)의 지위를 과연 그가 선택할 수 있을까? 모든 정적들의 가장 명확한 표적이 되어있는 자신을 쓰러뜨리고 그 공백 속에 머물기. 말하자면 그는 적의 힘을 소진시키며 사라지는 과녁, 블랙홀처럼 삼키며 사라지는, 빅뱅의 핵이 될 수 있을까?

 

결코 아비가 될 수 없는, 스스로 공주라 여기는 인형일 뿐인 박근혜의 드러난 존재론적 의미는 일종의 공백, 지금은 사라져버린 지지와 대의代議에 의해 구현된 기묘한 주술적 공백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는 거의 남아있지도 않은 권력의 몸통이기를 고집한다. 그런 한 그는 사라진 누군가들의 여전한 주술의 피조물인 동시에, 준열하게 죄를 묻는 국민과 실정법이란 칼날의 대상으로만 초라할 따름이다.

아마도, 어쩌면, 지금쯤 그는 사물의 차원으로 고요해져 있어도 좋지 않을까? 자기자신만을 가리키며 약동하는 힘들이 끝내 다다르는 고요한 물성의 경지가 그의 세계여도 좋지 않을까? 스스로의 내파를 겨냥하기라도 하는 듯, 의미의 집을 짓지 못하고 마디마디 내려앉거나 흩어지던 그의 말들, 늘 어눌하고 종잡을 수 없던 그 말들마저 내려놓고서 말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또한 실패한(불가능한) 성장의 서사, 일종의 잔혹동화다.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가 그러하듯 (완수되지 못한) 아비 살해 혹은 자식 살해에 관한 가차없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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