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아바타인 줄 알았는데 최순실의 아바타더라?
과연 그랬을까...?
어쩌면 최순실이란 존재는 절대권력을 누렸던 대통령 박정희의 ‘국가’와 더불어, 인간 박근혜의 리비도가 향했던 ‘불가능한 욕망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또한 최태민을 거쳐 최순실에 이르는 대를 잇는 ‘목소리’의 계보는 그의 ‘잃어버린 아비’의 운명적인 대체물이 아니었을까? 그런 한 그들은 권력의 화신 박정희(체제)의 은밀하고 희열에 찬 내분비물인 동시에, 권력이 끝내 감출 수 없었던 외설스럽고도 그로테스크한 누설물이 아니었을까?
박근혜와 최순실을 이해하려면 그들 각각의 행위가 그 스스로의 것이라기보다 그들이 서로를 통해 행한 것이라 파악해야 할 듯하다. 달리 말해 그 둘은 서로의 욕망의 거울이자 서로가 갖지 못한(가질 수 없는) 무엇을 가리키는 존재였을 것이다. 위선과 무능의 공주 박근혜에게 최순실은 당당히 드러낼 수 없는 온갖 세속적 욕망의 대상이었고, 꿈과 어둠의 주술사 최순실에게 박근혜는 죽었다 깨어나도 닿을 수 없는 권능의 화신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들은 둘이면서 하나였고, 하나이면서 둘이었다. 이른바 도플갱어(분신). 그 둘은 서로에게 불가능한 욕망을 한껏 투사하며 권력의 최면에 빠져들었고 일찌감치 대통령의 꿈과 더불어 모든 세속적 욕망을 함께 호흡하며 나누었던 듯하다. 마침내 다다른 청와대는 꿈꾸는 그들, 취생몽사의 구중심처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루어진 꿈은 그러나 궁극적으로 불가능한 무엇이기도 했다. 그 꿈 너머 혹은 그 꿈을 지탱하는 근원적 공허를 통찰할 능력도 용기도 그들에겐 없었을 터이므로. 그러므로 세월호의 참혹했던 그 시간, 그는 어디에 있었을까? 라는 의문은 또다른 의문에 가 닿는다. 과연 박근혜는 우리와 동시대에 살고 있기나 했던 것일까...? 그 시간 그는 물리적으로 우리와 멀지 않은 바로 거기 있었지만 또한 우리가 아는 그 어디에도 없었던 듯하다. 어쩌면 그는 지난 세기 70년대 어느 길 위에 갇힌 채 몽유의 푸른 집 깊이 잠들어있었던 게 아닐까...?
다 내려놓아야 할 시간, 여태도 국가와 권력의 구도 속에서 사라지길 거부하지만 그 자신의 자리에 함께할 한 줌의 빛도 없다. 빛은커녕 온갖 주사제로 오염되어 썩을 수도 없는 살肉만이 어둠 속에서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므로 저것은 권력의 죽음조차 아니다. 죽을 무엇도 없으니 죽지도 못하는 ‘산-죽음’, 이른바 좀비일 따름이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무無조차 아닌 무엇일 뿐이다.
그 앞에선 높디높은 벽이지만 정작 그 너머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에서 모든 권력은 무無의 가면이다. 불가피한 환상적 구성물이다. 민주적 대의권력이든 전근대의 세습권력이든 마찬가지다. 지금 우린 소환된 대의권력의 텅 빈 중심, 그 자리에 놓인 정체모를 오물 한 무더기를 지켜보고 있다.
‘대통령 박근혜’는 일종의 주술효과이자, ‘아무것도 없음’을 가리는 베일이었다. 최태민과 최순실의 주술이 박근혜와 박근혜의 운명을 주조했고, 오랜 시간에 걸쳐 정교하게 다듬고 세공했다. 물론 그 주술은 애당초 ‘박정희’라는 ‘원초적 아비’의 환상에 뿌리를 둔 것이다. 애당초 박근혜가 있었던 게 아니라 박정희가 있었고, 박정희 주술의 자장 속에서 빚어진 박근혜 현상이 박근혜란 방부 아바타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퍽이나 기이한 발생학, 아니 연금술.
금세기 세계사에 가장 해괴한 시대착오적 정치현상의 하나로 기록될 ‘대통령 박근혜’는 그러므로 박정희=최태민=최순실이 펼쳐낸 국민적 주술의 작품이었다. 법치의 태양 아래 빛나는 주술의 나라, 대한민국... 어떤 역사 이성의 간계였을까? 홀연 주술 효과가 사라졌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없음’조차 아닌, 낯뜨겁고 외설스런 배설물만 남았다.
누가 그것을 치워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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