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이후의 상황 전개가 궁금해진다. 탄핵표결 이전까지는 권력 출생의 비밀, 도착과 치정, 신파와 멜로, 스펙터클까지 가미된 선정적이면서 장대한 막장 드라마였다면, 표결 이후 국면은 촛불의 에너지가 다양한 정치 사회적 의제로 수렴되면서 제도정치권 내의 격렬한 개혁투쟁(=권력투쟁)이 예측불허의 양상으로 전개되는 특급 정치드라마가 될 듯하다. 물론 그 와중에 헌재의 탄핵심판 결정과 대선은 단연 최대 변수일 것이다.
어저께 종편TV를 보다가 한 패널이 ‘민중’이란 단어를 쓰는 걸 보았다. 실소를 금치 못했다. 21세기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인간상을 거의 담아낼 수 없는 저런 고색창연한 단어를 쓰는 용감한 이가 아직 있다니...? 뜨악해 하다가, 문재인이 내놓은 ‘국가대청소 6대 과제’란 것을 떠올렸다. 얼마든지 쉽게, 맛깔나게 풀어내도 좋을 내용을 어깨힘 잔뜩 넣어 무슨 혁명공약인양 살벌하게 제출하는 20세기 화법을 그 또한 참 용케도 구사하고 있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란 말이 무색하게 ‘새 술을 낡은 부대에’ 담는 그 특이한 재능은 당최 뭐라 해야 할지...
여튼 철지난 허세 작렬하는 그 구호를 보며, 대체 이번 일련의 촛불시위를 사람들은 어떻게 성격규정할까 궁금했다. 물론 상황은 긴박한 현재진행형이며 말마따나 (개혁이란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촛불광장과 제도정치권 사이에 형성되었던 전선은 급속히 엷어지면서, 여소야대의 정치권 내부로 전선이 옮겨가며 재형성되는 지금, 이후 국면이야말로 이번 사태의 진정한 의미를 뚜렷이 부각시키는 시기가 될 것임은 누가 봐도 분명하다.
흥미로운 건, 정치권 주요 일각에 이번 촛불의 성격을 일종의 새로운 시민혁명, 나아가 의사疑似 민중혁명 정도로까지 파악하고 싶어하는 부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혹이다. 그렇다면 대단한 착각이다. 이후 정국을 망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은 바로 거기에 있다.
제기된 의혹들과 관련된 여러 개혁의제들의 입법화나 정국 운영을 둘러싸고 벌어질 치열한 공방은, 황교안 체제의 장악력을 어느 정도 파행시키는 동시에 정파간의 이합집산과 대선 구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흘러갈 수밖에 없다. 신보수 재건과 의리의 정치를 각기 표방하며 분열이 기정사실화된 듯한 여권이지만, 막상 개혁적 쟁점들 앞에서는 일시 휴전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당면 이해와 여론 추이에 따라 일부 정파가 야권에 힘을 보태며 면죄부를 받으려 할 수도 있고, 공허해진 진영 논리의 성채로 퇴각하여 종북 노래 부르며 수구본색을 드러낼 수도 있다. 모든 사안들이 집권플랜의 시각에서 다루어질 게 뻔하기 때문에, 재집권만 가능하다면 여당이 도로 뭉칠 가능성조차 완전히 배제할 순 없고, 캐스팅보드 입지를 적극 활용하고 싶은 소수 정파들은 제3지대 방식의 정계개편으로 돌파구를 모색하며 급속히 대선정국으로 달려갈 가능성도 높다. 한국보수의 외설적 잔재물이 고스란히 담긴 탄핵안을 보수의 아성 헌재가 기각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판결이 지연될 성 싶으면 주춤하던 개헌론이 다시 대두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갠적으론, 내각제 개헌으로 빠른 시일 안에 총선을 통해 친박부역자들을 싹쓸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싶은데 현재로선 기대난망이다.)
시민사회에서 낮은 수위로나마 지속될 촛불 동력의 여세와 여소야대라는 유리한 구도에서, 야권은 압박과 타협을 능란하게 구사하며 각종 의혹 규명과 개혁 안건들을 차근차근 실속있게 밀고나갈 수도 있고, 정의감만 앞세운 과욕으로 비타협을 고수하며 소모적인 전투를 일삼다가 보수언론과 여론의 십자포화를 받고 기진맥진하거나 대선구도 속에서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들이 제시하는 개혁의제를 적극 지지해줄 백만 촛불도 그 때는 더 이상 곁에 없을 것이다. 촛불 사라진 거리는 성급한 개혁의 실패에 분노하고 좌절한 투사들만의 현장이 되어버릴지 모른다. 개혁의제는 논리적 당위성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시킬 구체적인 힘을 통해서만 정당화된다는 것은 불변의 진실이다.
촛불은 살얼음판을 딛는 개혁정국의 큰 첫걸음을 열어주었을 따름이다. 상실의 자괴감과 더불어 냉정한 자기정비의 시간을 지나고 있을 보수의 권력감각은 지금 어느 때보다 예민해져 있다. 여태 자주 그랬듯 조급하고 서툰 진보의 섣부른 실수는 순식간에 반동의 역풍과 보수결집을 불러와 개혁동력을 일거에 날려버릴 수 있다. 그것은 다가올 대선판조차 위태롭게 흔들어버릴 것이다.
촛불은 혁명이 아니다. 어쩌면 그건 일종의 소비행위였을지 모른다. 21세기적 납세 주체들의, 저마다 생각하는 주권 이미지의 발랄하고 통쾌한 소비활동 한마당. 주권자의 정치행위나 전복욕망조차 더 이상 상품시장 영역 바깥이 될 수 없는 시대임을 감안하면, 저 촛불은 가성비가 형편없는 불량 국가, 불량 대의제를 향한 소비자 불만의 집단적 표출 혹은 새로운 소비행태의 위력적인 과시행동이었을지 모른다. 또 집회현장의 바깥에서 TV로 그것을 지켜본 대다수 국민들에게도 촛불은, 장대한 스펙터클 이미지 혹은 한편의 박진한 반전서사를 짜릿하게 소비하는 행위였을지 모른다. 그 관점에서, 이번 사태 전개의 한 주역으로 막강한 권력 위상을 입증한 언론자본이 박근혜게이트의 최대 수혜자라 해도 과언 아닐 것이다. 이른바 미디어크러시. 정치가 유력한 이미지 상품이 되어버린 시대, 이미지에만 집착하다 파탄난 대통령. 후대의 미디어는 그렇게 기억할지도 모른다.
평화시위 후 자발적으로 쓰레기를 치우는 대목을 지적하며 어느 역사학자가 언급했듯, 혁명이라 해도 촛불집회는 근본적으로 보수혁명이다. 우리가 만든 쓰레기 우리가 치우겠다는, ‘대의권력을 사유화’한 권력자를 내쫓고 훼손된 형식민주주의를 복원하겠다는 시민적 주권의지의 표현이다. 평화집회에 참여한 다수 시민들의 의지는 훼손된 국가구조의 정비, 국가시스템 운영의 투명함과 공정성에 대한 요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박정희 체제의 은밀하면서도 공공연한 유산을 청산하는 작업이란 의미에 주목한다면 미완의 시민혁명에 대한 뒤늦은 보완의 성격).
물론 그 외에도 수많은 다양한 의사표현이 촛불에 담겼을 테지만, 대부분은 당장의 정치적 의제로 수렴되기 쉽지 않다. 촛불을 통해 일단 수면 위로 떠오르고 더 널리 공유될 그것들은 앞으로 다양한 방식의 논의과정을 거치며 또다른 사회적 의제들로 정리되거나 흩어져, 우리 사회 각 분야와 일상적 삶의 현장들을 돌아보게 하는 매듭 혹은 계기로 작동하며 흘러갈 것이다. 그래서 변화를 추구하는 모든 운동들은 참가자들의 의지와 상상을 훌쩍 넘어서는 무엇이 되어 어느날 불쑥 다시 나타나거나, 나비효과처럼 쉽사리 예단하지 못하는 어떤 결과를 낳기도 한다. 추세와 지속을 따르는 대신 단층선과 미세한 균열의 실금들을 따라 시선과 상상을 풀어놓아 본다면, 어쩌면 촛불은, ‘보수혁명’만이 아닌 아직 아무도 모르는 무엇의 씨앗일 수 있다. 폭풍을 날개짓하는 나비를 알아볼 자 어디에도 없을 터이니.
다양하게 제기되는 개혁과제들과는 별도로, 이번 사태가 섬뜩하게 드러낸 회피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 대의민주제의 합리적 형식 자체만으로는 결코 보장될 수 없는, 나아가 그 형식을 성긴 틈을 보완한다는 언론과 SNS같은 디테일마저 의심하게 만드는, 권력 구조의 어떤 비합리적 성분 혹은 보이지 않는 구멍. 다시 말해 민주주의란 제도 자체에 내재한 위험과 숨은 가능성을 충분히 음미해보았느냐는 물음.
그 자신이 처한 지위와 누리는 권력의 바탕에 있는 ‘민주’란 절대가치는 나몰라라 하면서, 왕조시대적 권력체계나 패거리 문화를 지탱하는 ‘의리’와 ‘배신’의 코드로만 정치를 이해하고 또 그런 정치를 해온 자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에 새삼 경악하면서, 대통령제든 내각제든 또 어떤 권력구조에서든, 우리가 너무 쉽게 쓰는 ‘대의’와 ‘권력’이란 개념이 근본적으로 상충하는 두 불가사의한 사물적 실재가 아닐까 하는 불안 혹은 의심.
그래서 거짓이 불가능하고 배신이 불가능한, 진실과 정의의 세계를 세우겠다는 대의권력의 정치 언사 또한 믿지 않는다. 인간은 거짓말하는 존재며 자신조차 배반하는 존재다. 신 앞에 맹세한 사제집단만이 거짓말을 할 수 없으며 배신을 할 수 없다. 스스로의 거짓과 배신의 가능성에 불안해하며, 무너져내리는 의지를 쉼없이 추스르는 태도가 오히려 인간답고 정직해 보인다. 민주국가의 주권자로서 나는 사제같은 정치인을 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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