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12.3) 저녁, 오랜만에 만난 친구랑 삼겹 구워 소주 마시며 6차 촛불집회 광경을 TV로 건너보고 있었다. 전국의 참가인원이 이백수십만에 달한다는 자막이 뜨고 있었다. 불현듯 ‘현현顯現’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거리의 촛불은 대의권력을 향해 묻고 있었다.
“내가 누구냐? ”
매 집회 때마다 되풀이해서 제기된 질문이었지만, 대의권력의 대답은 머리나쁜 학생의 답변처럼 게으르거나 부실했다. 명백한 그 답을 올바로 대지 않고 에두르거나 회피해 왔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여당 야당 마찬가지였다.
‘주권.’
거리의 촛불은 바로 ‘주권’의 현현이었다. 신의 얼굴처럼, 아름답고도 무시무시한 주권의 맨얼굴이었다. 경외심마저 일으키는 장엄한 그 광경에 감탄하며, 87년 6.10 때의 시간을 회상했다. 당시 매일 붙어지내다시피 했던 그 친구의 부인은 오늘도 시내집회에 나갔다고 했다.
“아지매, 오랜만에 옛날 생각하며 신명나겠구마는? ㅎㅎ”
말해놓고 보니 나이만 훌쩍 들어버렸다는 느낌이 스쳐갔고, 소주 한잔을 후딱 털어넣었다. 또다른 단어가 떠올랐다.
‘임박한 파국.’
박근혜게이트가 터진 지난 10월말 이래 매주말이 정국의 분수령이었다 해도 과언 아니지만, 탄핵표결이 이루어질 12월 9일이야말로 숨가쁘게 달려온 현 국면의, 아니 21세기 한국 정치사의 결정적 분수령이 될 거라는 데 우리는 의견을 같이했다. 무능한 야당과 꼴통 친박 사이 우유부단한 비박에게 쥐어진 카드가 상황을 주도할 열쇠가 아니라 폭탄이었음은 이제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임기단축’이란 묘수로 잠시 교란되었던 선택지는 다시금 명료해졌다. 탄핵이냐, 즉시퇴진이냐? (아니나 다를까, 어제(12.4) 오후 비박의 탄핵표결 참여 결정이 보도되었다. 그러게, 루비콘강 건너서 돌아보는 등신이 천지 어딨노...ㅉㅉ. 파국은 없을 거 같다.)
이런저런 얘기 나누다 촛불시위의 평화적인 성격이 화제가 되었다. 대체 ‘어떻게?’ 저게 가능할까? ‘평화적인 대규모 시위’는 일종의 형용모순 같았다. 저 정도 규모의 시위에서 어떻게 격렬한 해방감의 표현이라든가 전복적 욕망의 무질서한 분출이 없을 수 있을까? 통상 시위란 게, 부당하다고 여기는 권력에 대한 불복종과 저항을 표현하는 거고, 거의 불가피하게 분노의 물리적 표현으로 치닫게 마련인데, 저러한 질서의식과 고도의 평화유지 감각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그것은 시위를 주체적으로 잘 ‘통제한다’는 기술적 측면보다 시위 참가자의 근본적인 정서와 태도에 기인하는 듯했다.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겠지만(전국민적 공분에 바탕한 든든한 연대의식이 이길 수 있다는 확고한 자신감을 부여하며 좌절감이나 초조감을 억눌렀고, 일부 시민들이 거칠게 표출할 수 있었을 분노의 에너지를 수렴하고 승화하는 다양한 놀이문화판이 펼쳐졌다는 것과, 또 그간 자주 자행되었던 경찰의 자극과 과잉진압 태도가 없었다는 점 등등...을 당장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한 마디로 집단적 분노조절 능력이 경이롭도록 탁월하다는 것.
공허한 우익의 멘탈을 고답적인 탐미의 수사와 논리비약하는 문장으로 뱉아내며 종종 욕을 자초하던 작가 이문열에게 북한의 ‘아리랑 축전’을 착시케 한 대목 역시 저 놀라운 질서정연함과 주도면밀한 사전연출로 보일 법한 극도의 절제력이었을 것이다. 인도 무굴제국시대 수피즘 시인의 ‘죽어라, 죽기 전에’ 란 시구詩句까지 선정적으로 인용하며 보수의 절대각성을 촉구하겠다는 의도는 좋았으나, 작가답지 않게 척박한 상상력이 문제였다. 불행한 개인사가 각인한 ‘집단=불온’이란 어릴 적 트라우마를 그 연세 들도록 떨치지 못했으니, 사람은 결국 보고싶은 것밖에 볼 수 없는 존재인갑다. 짠한 연민마저 든다. ‘아리랑 축전’ 의 멘탈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이문열의 욕망은 뭐랄까... 시위에 참가한 어느 시민의 지적대로, 한번도 집단의 성원이 되어 무언가를 함께 이루어내 본적이 없고 (혹는 절대 그럴 수도 없는) 사람의 질투어린 선망같은 게 느껴진다면 좀 비약일까? 소위 리버럴한 개인주의자를 자처하는 자들의 함정, 터무니없이 격렬한 과민반응을 통해 은연중 자신의 불가능한 욕망의 대상을 스스로 손가락질하는 형국. 늘 그래왔듯, 이문열류의 상처입은 고독한 영웅숭배자들의 은밀한 욕망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경멸해 마지않는 대중 그 자체를 향할 수밖에 없을 터이니 말이다.
상대 정파 국회의원 개개의 탄핵 찬반 성향을 발표한 표창원 의원이 언론의 몰매를 맞았다. 그런데 비판이 표적이 빗나가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그의 방법은 좀 졸렬했다. 미확인 정보를 거칠고 선동적인 방식으로 유포했다. 그러나 그의 요지는 대의권력의 의사결정에 대해 주권자는 알 권리가 있다는 점이다. 국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표결은 비밀투표가 아니라 원칙적으로 공개투표여야 한다. 국회의원의 투표행위는 반장선거나 조합원 선거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사적 개인, 개별 주권자의 투표행위가 아니라 위임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국회의원 각각은 헌법적 대의기관이며 그들의 권리는 주권자 개인의 권리가 아닌 대의권에 불과하다. 하야 탄핵 요구가 국민여론의 70%를 넘는데도 탄핵안 부결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건 대의기구가 민의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며 대의권을 자의적으로 남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내각제와 대통령제에 대한 호불호를 얘기하다가 친구로부터 흥미로운 의견을 들었다. 유럽생활을 몇 년 해본 그는 내각제가 끼리끼리 뒷거래로 다 해처먹기 좋은 제도라며 비판적이었는데, 저런 촛불집회처럼 전국민적 카타르시스를 주는 행동이 대통령제 아니면 어찌 가능하겠냐는 주장이었다. 일리있어 보였다. 권력에 대한 물신숭배를 조장하는 나쁜 제도 중 하나가 대통령제라고 여겨온 내겐 좀 역설적이면서도 참신한 관점이었다. 말하자면, 주권자의 의사가 늘 온전히 반영되기 어려운 대의민주제는 한번씩 스팀을 빼줄 구녕을 필요로 하는데, 정치기술자들의 유능함에 의존한 기능적 합리성으로 포장된 내각제는 그럴 여지가 없으니, 정치의 실패에 대해 환멸하면서도 확~! 한번 뒤집거나 폭발시켜버릴 방법도 표적도 없어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난 반박했다. 내각제에선 저런 푼수가 총리 될 일 절대 없으니, 국민들이 지금처럼 손발 고생해가며 똥치우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러나 분명 음미해볼만한 지적이었다.
대통령에게 부여되는 막강한 권력이 그 상징체계의 꼭지점에 어떤 초월적 존재자의 형상(가상)을 불가피하게 만들어내긴 하지만, 그 가상(환상)이 오히려 체제의 전복을 가능하게 하는 동기부여자나 지렛대, 나아가 명료한 표적 노릇까지 할 수 있다는 것. 그 점에서 내각제는 보편적 정의감이나 권력욕을 투사할 가상의 중심도 없고 전복 욕망을 들이부을 주된 표적 또한 없거나 모호한 시스템이란 건데, 아마 그게 대부분 내각제가 실권형 내각과 함께 형식적 국가원수를 따로 유지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앞서 언급한 ‘주권의 현현’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평소엔 드러나지 않는 대의권력의 궁극 기초인 시민적 ‘주권’이 대의권력 시스템의 꼭지점에 자리한 가상적 존재에 자기소외의 형식으로 은폐(구현)되어 있다는 것이니, 이번 촛불집회같은 상황에서 가장 멀리 있는 듯 보이던 두 지점, 즉 ‘대통령’과 익명의 ‘촛불시민’이 기실은 서로를 직접 반영하고 함축하는 불가분의 존재임이 가차없이 드러난다. 달리 말해, 저 ‘현현’의 순간, 드높고 막강해 보이던 대통령의 자리는 속이 텅 빈 가면에 불과하고, 평소 아무것도 아닌 듯하던 일개 시민이야말로 모든 대의권력이 그로부터 비롯되는 바로 그 ‘주권’의 소재지라는 민주주의 제일원리가 입증되는 것이다.
답없는 의문만 맴돈다. 터무니없는 단순화겠지만, 최고권력자의 선의와 결단에 많은 것을 기대야 하는 제도보다, 논쟁하는 다수의 지혜로 운영되는 시스템의 효율에 기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김빠질 구녕, 혹은 다중 욕망의 소실점 내지 가상은 어쨌든 거기서도 만들어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또 권력에 대한 환상과 신비화가 인간의 불가피한 현실이라면, 그것이 초래할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것을 용인하는 제도 속에서 사는 게 자연스러운 것인가, 환상과 신비화를 부정하고 억압하는 제도 속에서 이성의 한계나 억압된 환상의 복수와 대면할 것을 각오하며 사는 게 오히려 인간다운 노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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