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잉여'와 '속물'의 풍경] 김수환, 소영현, 심보선 대담
"단지 연결하라! (…) 산문과 열정을 연결하라.
그러면 그 양쪽이 모두 고양되고, 인간의 사랑은 정점에 이르게 될 것이다. 다시는 조각난 삶을 살지 마라. 단지 연결하라.
그러면 고립을 먹고 사는 짐승과 수도승은 생명줄을 잃고 죽을 것이다."
<하워즈 엔드> 중에서(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열린책들 펴냄)
2008년 경제위기 전후로 '88만원 세대' 담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2012년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여 세대 간의 갈등은 정점에 달했다. 늙은 보수와 젊은 진보, 혹은 늙은 속물과 젊은 잉여의 대립 구조는 서로를 향한 원한과 무시로 점철되는 듯했다. 풍요롭기만 했던 (것처럼 보이는) 과거는 질투의 대상이자 지금의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사회를 야기한 잘못 꿰어진 단추였다. 혹은, 무례하고 무식하며 가난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재는 대의와 정의를 위해 온 몸을 바쳐 싸웠던 (것처럼 보이는) 과거를 수치스럽게 더럽히는 얼룩이었다.
▲ <속물과 잉여>(김상민 외 지음, 백욱인 엮음, 지식공작소 펴냄). ⓒ지식공작소
그러나 이 대립 구도를 들여다보며 규명하려는 시도는 지난 몇 년간 꾸준히 진행되었다. 2009년 <마음의 사회학>(김홍중 지음, 문학동네 펴냄)과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서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서동진 지음, 돌베개 펴냄)에서 시작하여 2010년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20대와 함께 쓴 성장의 인문학>(엄기호 지음, 푸른숲 펴냄), <잉여의 시선으로 본 공공성의 인문학-위기의 지구화 시대 청(소)년이 사는 법>(구미정 외 지음, 이파르 펴냄), 2012년 <우애의 미디올로지-잉여력과 로우테크로 구상하는 미디어 운동>(임태훈 지음, 갈무리 펴냄)와 <우리는 디씨-디시, 잉여 그리고 사이버스페이스의 인류학>(이길호 지음, 이매진 펴냄), 2013년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청년 논객 한윤형의 잉여 탐구생활>(한윤형 지음, 어크로스 펴냄), <잉여사회>(최태섭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속물과 잉여>(김상민 외 지음, 백욱인 엮음, 지식공작소 펴냄)가 잇달아 출간되었다. 이 책들 속에서 '속물' 혹은 '잉여'에 관한 서술은 한국사회에 관한 문화기술지로 점점 더 확장되었다.
물론 여전히 '감수성'이나 '문화'의 차원에서만 분석이 시도되는 측면이 있다. 그 안에서의 계급적 차이를 정교하게 살펴보는 세분화된 담론들(다시 말해 젊은 속물과 늙은 잉여)은 선명하게 출현하지 못했다. 세대론의 연장으로만 이분법적으로 논의되는 측면도 분명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물'과 '잉여'라는 주체가 동시대를 점유하는 가장 큰 감수성의 주체이거나 사회적 풍경을 구성한다는 판단 하에, '프레시안 books'에서는 이 주제에 관한 대담을 마련하고자 했다. 대담에 참여한 세 사람은, 이 주요한 열쇳말들에 대해 확신 어린 정답을 내놓기를 주저했고, "단지 연결하라"라는 E. M. 포스터의 간절한 외침처럼 제안하는 것까지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닌가, 라고 대화했다.
<속물과 잉여>에 실린 '웹툰에 나타난 세대의 감성구조-잉여에서 병맛까지'를 쓴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학과 김수환 교수, '한국사회와 청년들-'자기파괴적' 체제비판 또는 배제된 자들과의 조우'를 쓴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의 소영현 HK연구교수, 그리고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인 심보선 시인을 대담에 초대했다. 심보선 시인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김홍중 교수와 함께 2008년 '1987년 이후 스노비즘의 계보학'을 <문학동네>에 발표한 바 있으며, 그 글은 <그을린 예술>(심보선 지음, 민음사 펴냄)에도 실려 있다.(한편 김홍중 교수는 <속물과 잉여>에서 그 글의 속편 격인 '삶의 동물/속물화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귀여움-87년 에토스 체제의 붕괴와 그 이후'를 실었다.)
아래는 지난 11월 5일 <프레시안>에서 열린 대담 전문이다. 진행은 김용언 기자가, 정리는 안은별 기자가 맡았다. <편집자>
속물에게는 삶이 전쟁이다
프레시안 : <속물과 잉여>라는 논문선에서 이 대담이 출발하긴 하지만, 거기 실린 논문들만 중점적으로 얘기하기보다 현재 한국사회를 중요하게 설명할 수 있는 열쇳말로서 '속물'과 '잉여'에 대해 살펴보고 싶다. 세 분의 각자 영역에서 이 두 열쇳말에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지 말씀해주셨으면 한다.
덧붙여 심보선 선생님의 경우, 김홍중 선생님과 2008년 함께 쓰신 글 '1987년 이후 스노비즘의 계보학' 이후 6년의 세월이 지나며 어떤 지점에서 생각이 달라지셨는지, 그리고 김수환 선생님의 경우 20대의 공통언어에 대해 이야기하시면서 왜 웹툰을 그 플랫폼으로 주목하게 되셨는지, 소영현 선생님의 경우 배제된 것들의 문학사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2000년대 문학에서 잉여 혹은 속물로서 타자화된 청년들이 어떤 식으로 표상되고 있는지에 대해 집중해서 말씀해주시면 어떨까 싶다.
심보선 : 사실 스놉(snob)이 왜 '속물'로 번역되는지 모르겠는데, 스놉의 의미에 대한 변천사가 있다. 19세기 중반 영국 작가 윌리엄 새커리가 <Book of Snob>을 쓰면서 '스놉'을 정의내렸다. 천박한 존재, 욕망하는 사람으로서의 스놉은 사교장, 궁정, 카페 등 도처에서 발견된다. 왜 속물이라는 주체가 그 시대에 문제가 되었을까를 보면, 당연히 자본주의의 역사적 등장과 일종의 계급투쟁 문제가 대두된다. 마르크스적인 의미에서의 계급투쟁이 아니라 사회적인 지위를 얻기 위한 인정투쟁이다.
문제는 속물은 항상 실패한다는 사실이다. 자기가 괜찮은 존재임을 옷이라든가 매너 등의 외부적 상징을 빌려와 입증하는, 내면 없는 존재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그런 문화나 상징을 잘 다룰 수 있는 타고난 본성이 없다. 그런 본성은 교육되고 체화되고 내면화되기 때문에 그들에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교장 등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강박으로 말이 많아지고 과시적이 되지만, 역설적으로 성공하지 못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존재하고 문화적인 것을 둘러싼 사회적 지위투쟁이 존재하는 한, 속물도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또한 속물에 대한 안티테제인 진정성(authenticity)도 존재한다. 진성성은 인간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삶의 준거를 찾고자 하는 근대적 삶의 태도다. 그런 내면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며 세계와 관계를 맺는 존재가 진정성의 존재다. 그리하여 진정성과 속물성은 항상 쌍을 이루었다.
그런데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소위 진정성이라는 내면을 가진 존재, 그 존재와 세계의 관계 맺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2008년 김홍중 선생과 '1987년 이후 스노비즘의 계보학'을 쓰기 시작했을 때 한국이 그런 상황이라는 인식을 함께 했고, 그 시기를 '87년 이후'로 잠정적으로 이야기했다. 과연 그게 87년 이후에 시작된 게 맞는지의 여부는 지금은 확신하진 못한다.
한국에서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양상을 보면 굉장히 속물적이다. 홉스의 표현을 그 글에 쓴 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반드시 계급적 차원뿐만이 아니라 지위적·상징적 차원에서 극렬하게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계층이 낮건 높건 누구나 이 투쟁에 참여하고 있다.
속물한테는 그래서 이 세계가 전쟁터다. 하다못해 소규모의 만남의 자리조차도 전쟁이다. 나를 어떻게 멋지게, 그럴듯하게 드러낼 것인가라는 강박 때문에, 일생 전체가 전쟁인 셈이다. 그런 태도, 그런 마음의 풍경이 당시 한국에 밀어닥친 신자유주의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프레시안 : 2013년에는 그 생각이 달라졌나.
심보선 : 이 책 제목은 <속물과 잉여>지만, 내가 '1987년 이후 스노비즘의 계보학'을 쓸 땐 '속물과 동물'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코제브의 개념인데, 속물에게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전쟁터라면 동물에게는 모든 것이 자기 개체의 유지와 보전을 위한 먹이다. 동물은 굉장히 온화하고 온순하고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먹지만, 반면 속물은 다 죽이고 밟고 올라서는 전쟁 상태로 세상에 임한다. 그 속물과 동물 사이에서 과연 인간이란 게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 <그을린 예술>(심보선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바디우도 그런 이야기를 했더라. 우리가 항상 인간인 건 아니라고. 비인간으로부터 탈출하는 계기로서 인간성이 주어질 수 있다고. 특히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인간은 동물로 배제되느냐 속물로 이기느냐의 사이를 오갈 수밖에 없다. 2008년에 그 글을 쓴 다음엔 과연 그렇게 가까스로 주어지는 인간성의 계기가 있을까, 어디서 인간일 수 있을까란 질문 앞에서 비관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러 계기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08년 이후 내가 겪은 사건, 내가 만난 사람과 공동체, 활동 등에서 저항하는 사람이 있었다. 예술적인 실천들도, 어떤 형태의 공동체적 관계들에서 희미하지만 지속되는 인간의 기운도 볼 수 있었다. 희망버스나 용산, 두리반, 아마추어 예술, 그리고 <그을린 예술>에 등장하는 시 쓰는 할머니 같은 사람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김수환 : '토탈 속물' 사회는 아니라는 건가?
심보선 : 일종의 미시 권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간들이 적응해 살아가는 그 미시 권력 네트워크에도 균열과 틈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오늘 하루 종일 '주로' 속물이었는데, 10분 정도는 인간이었다고 해보자. 그 다음날은 11분으로 늘어날 수 있다. 일종의 임계점이라는 게 있잖아. 미시적 움직임들이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으면 갑자기 급격하게 증폭되는 현상이 인간성에서도 적용된다고 본다. 굉장히 작은 계기들이 쌓이면 인간의 시간과 장소가 늘어나는 거다.
김수환 : 지금 심보선 선생이 이야기한건, 우리가 예전에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오종우 옮김, 열린책들 펴냄)에 대해 나누었던 대화의 주석이다. 그러니까 체호프의 작품에는 독자들은 물론 작중 인물조차도 감지하지 못하는 미세한 커브가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면 한 순간 확 커브가 휘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독자도, 작중 인물도 그 임계점에 오기 전까지는 계속 직선으로 움직였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체호프의 중요한 세계관 중 하나가 인간이 변화되는 결단은 예외적 순간에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 속에서 인간적 결단이 나오고, 그게 아주 감지되지 않을 정도의 미세한 커브를 그리다가 어느 순간 확 휘어지는 걸 보여준다.
우리가 잉여를 주목하는 이유
프레시안 : 김수환 선생님과 소영현 선생님도 본인의 관심 지점에 대해 이야기해주신다면.
김수환 : <속물과 잉여>를 받아들고 개인적으로 당황한 부분을 먼저 말해보겠다. 진정성의 시대가 가고 속물의 시대가 왔다고 규정하는 것도 하나의 서사고, 속물의 시대가 가고 잉여의 시대가 왔다는 규정도 서사다. 심지어 여기엔 애비는 속물이 되었고 그 자식들은 잉여의 나락에 떨어졌다는 내러티브가 있다. 아예 세대론과 협착된 것이다. 아버진 속물, 자식은 잉여, 이렇게 만드는 순간 역사적 선후관계뿐 아니라 인과관계까지도 들어간다. 정리가 너무 말끔하지 않은가.
속물과 잉여라는 개념을 사회학·경제학·인류학·문학·사상사 등으로 전방위적으로 여러 사람이 이야기하잖아. 난 책을 다 읽고 나서 잉여나 속물에 대해 막 이야기하면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다양한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게 섣불리 이야기하기 힘든, 복잡하고 알 수 없는 현상임을 증명한다고 보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속물/잉여란 무엇이다'보다, 오히려 이렇게 재단하면 안 되겠다는, 그 재단한 것들을 추려서 제거하는 방향으로 가는 접근이 맞지 않냐는 생각이 든다.
소영현 : 김홍중 선생과 심보선 선생이 1987년 이후 한국사회를 속물이란 키워드로 설명하셨는데, 난 예전부터 생각했던 점이 전쟁 이후 한국사회에 뚜렷하게 드러나는 현상 중 하나가 70년대를 기점으로 한 속물성이 아닌가 하는 부분이었다. 속물 주체가 아니라 속물성을 한국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열쇳말로 생각한다.
그리고 잉여와 잉여문화는 좀 다르다. <속물과 잉여>에서는 잉여문화에 더 관심을 기울인 것 같은데, 뉴미디어에 기반한 새로운 문화를 잉여란 언어로 소환한다고 할까. 그간 뉴미디어나 인터넷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은 배제된 자, 소수자라는 분석틀이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청년 백수, 여자, 노인, 아이, 할 일 없는 사람들 말이다. 이러한 분석에 동의하지 않지만, '잉여질'이란 말 자체 밑에 소수자/타자라는 인식이 깔려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타자라는 말 대신 소수자, 그리고 이제 잉여라는 말로 옮겨온 건 아닐까. 즉 잉여가 타자의 새로운 버전의 열쇳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심보선 : 적어도 속물이라는 열쇳말이 아주 보편적으로 연구되는 건 아니지만, 잉여는 상당히 널리 사용되는 열쇳말인 것 같다. 이를테면 바우만이 잉여 개념을 '쓰레기'라는 단어로 아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실업자, 혹은 산업예비군은 시스템이 필요로 할 때 언제든 다시 데려올 수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잉여는 그렇지 않다. 한 번 잉여는 끝까지 잉여다. 바우만에게 잉여는 개인들이 아니라 군(群), 구조에 의해 만들어지는 쓰레기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한국사회에서 쓰이는 잉여질, "나 잉여야"의 잉여에는 또 다른 함의가 있다. 일상 속의 잉여와 학계에서 분석하는 잉여가 만난다면, 또 다른 관계 속에서의 잉여에 대한 제3의 논의가 나올 수 있겠지.
김수환 : 한국적 맥락 속에서 잉여를 논할 때 인터넷이란 매체와 가깝게 밀착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한데, 이게 얼마나 보편적인지는 따져보아야 한다. <속물과 잉여>에 실린 김상민 씨 글 '잉여미학-뉴미디어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한 노트'를 보면, 소위 포스트 포디즘 이후 뉴미디어를 통한 기계적 착취가 자본에 있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시장이라고 표현했다.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잉여적 실존이 뉴미디어와 밀착해있는 건 어느 정도 보편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이 훨씬 더 뚜렷하고 가깝게 밀착된 듯하다.
인터넷은 현실만큼이나 중요하고 잉여들의 실존에 있어 굉장히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이 책에서 이길호가 쓴 글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증여의 논리'를 보면 "존재의 함성"이라고 표현한다. '디시 인사이드' 유저들이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열심히 하고 이것저것 공유하려고 하는가, 거기서 존재의 함성을 외친다는 거다. 단순히 시간이 많아서가 아니다. 주체성 형성에 있어서 웹 공간에서의 실존이라는 게 굉장히 크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인터넷이라는 뉴미디어 환경과 결합된 웹툰을 주목하게 됐다.
또 한 가지는, 모든 세대는 자기들의 매체를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90학번인데, 80년대 학번에게는 문학을 통해 자기 세대가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가 있었다. 90년대 학번에게는 주로 영화였다. 조금 윗세대가 영화를 찍으면 "저게 우리가 보고 싶은 얘기지"라는 느낌이 있었다. 그럼 지금 세대가 어디서 그걸 보고 찾을 수 있을까. 문학이나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기를 건다는 차원에서, 웹툰이 새로운 세대의 매체가 아닐까 싶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웹툰이란 매체가 갖는 세대론적 함의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점점 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웃음) 어쨌든 이 글을 썼을 땐, 2000년대 세대의 목소리를 담는 매체로서 웹툰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준 게 이말년의 작품이었다. 그 모든 것들을 한 줄로 꿸 수 있는 콘셉트가 잉여였고.
심보선 : 스마트폰으로 뉴스 댓글을 하나하나 꼼꼼히 읽는 사람을 지하철에서 본 적 있다. 잉여 사람이든 잉여 시간이든 그 안에서 굉장히 들끓고 있다. 24시간 중에 그 잉여짓하는 시간이야말로 누군가에게 가장 뜨거운 시간일 수 있다는 거다. 그 시간 동안 비로소 가장 나은 존재, 치열하게 대화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심지어 거기에는 선의도 존재한다.
어떤 사람이 만화를 스캔해서 계속 업로드를 했다. 누군가는 참 할 일도 없다, 혹은 저작권 개념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당사자는 "죄송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내일 출장이라서"라고 쓰고 퇴장하더라. (웃음) 이런 쓸 데 없는 짓을 하게 하는 힘이 뭘까. 거기엔 선의도 있고 격려도 있다. '이해합니다, 덕분에 좋은 작품 보고 있습니다' 이런 댓글이 달린다. 가장 한심한 짓거리 안에 상호인정, 호혜성, 훈훈함이 다 있는 거다.
물론 그것의 다른 버전이 '일베'일 수 있다. 우리가 볼 때 가장 악랄하고 한심한 행동 속에서 그들은 정의롭고 도덕적이다. 서로 상호인정도 한다. 그러니까 인터넷이라는 미디어가 누구에게나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는, 어쩌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기회나 장을 제공해 준다는 거다. 그래서 보통 직업 없는 사람들이라든지 현실에서 인정 못 받는 사람들이 잉여질을 한다는 생각에서 의미를 좀 더 넓혀볼 수 있다. 지금 사회는 직장, 학교, 일상적인 인간관계 안에서 보상받기 힘들다. 하지만 인터넷에선 누구나 더 나은 존재로 타인과 의미 있게 관계 맺으며 도덕적으로 선한 존재가 될 수 있고, 어떤 때는 미학적이고 심지어 지적인 활동들을 무한하게 행할 수 있다.
잉여와 속물을 바라보는 고정된 시선의 폐해
소영현 : 우리가 잉여질의 생산성, 다시 말해 긍정적 측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심보선 : 아, 내가 말하는 생산성은 다르다. 잉여질의 생산성은 사회에 기여한다 이런 측면이 아니고, 뭔가 추가되어 전체 시스템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문화 생산논리와도 전혀 상관없는 생산성이다. 자기 긍정성 말이다. 내가 왜 이렇고 밤새서 앉아있지, 하면서도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소영현 : 무슨 말씀인지 이해한다. 사실 구분하기 어려운 지점이라고 생각하고, 다만 우리가 잉여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도 모르게 빠지는 함정이 있다는 뜻이었다.
김수환 : 먹물들의 습관이기도 하고, 20대 아닌 세대가 20대의 행동을 이해하고 설명하려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며, 미지의 부족을 이해하려는 인류학자의 태도기도 하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쓸데없는 짓에 잠재력이라는 의미를 부여해보려는 욕구이기도 하다. 잉여 담론 뿐 아니라 20대 세대론 전체에서 그렇다.
생산적인 무언가로 전환할 수 없다는 게 잉여질의 고유한 본성이자 특수성이고, '쓸데없음'이 계속 쓸데없어야지 쓸데를 찾게 되면 이미 잉여의 잠재력이 아니지. 그렇다 하더라도 설명하고자 하는 욕구와 부딪혔을 때,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이게 과연 새로운 주체성의 지점이 맞는가. 잉여의 연대가 성립을 하는가. 그냥 시대의 징후이자 흔적이고 상처의 지점이지, 새로운 가능성이라든가 로도스 섬은 아니지 않은가. 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서 제대로 관찰하는 건지 자기반성이 든다.
하지만 이 책에서 잉여가 규정되는 방식, 말 그대로 속물에 진입 못해서 탈락하거나 유예됐거나 전적으로 수동적인 존재라고 보는 것,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냈다고 보는 게 맞는지에 대해선 또 다른 문제의식이 있다. <속물과 잉여>에 실린 한윤형 씨 글에서 잘 드러나는데, 잉여의 '감수성'의 진폭은 그 세대 내에서는 상당히 넓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를 다니고 있으며 이제 한 발자국만 내딛으면 속물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애들부터, 학벌 카스트에서 탈락한 애들까지 잉여적 감수성에 대해 고르게 반응한다. 과연 현재 한국사회 청년층의 대다수를 아우르는 공통감각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바로 이런 잉여성이 몇 안 되는 공통감각이라는 생각은 있다. 그래서 그 부분을 버리고 가기엔 너무나 아깝다. 취향으로 산산이 쪼개진 감수성의 세대 가운데에서 많은 영토를 차지하는 잉여성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소영현 선생이 쓰신 글들을 죽 보면, 잉여라는 게 청년 세대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문제의식이 있는 것 같다. 현재 전세계적인 쓰레기를 만들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사는 한 그 사회경제적 조건이 전 세대로 퍼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잉여 문제가 얼마나 보편적이고 얼마나 세대론적 특수성이 있다고 보는지 질문하고 싶다.
프레시안 : 거기 덧붙여 본다면, <속물과 잉여>가 세대론적으로 서사화되었다는 지적에 동의하면서, 늙은 속물/젊은 잉여라는 구도에서 벗어나 늙은 잉여/젊은 속물로까지 이야기가 확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늙은 잉여나 젊은 속물이 <속물과 잉여><잉여사회> 등 이 개념을 분석해보려는 학술적 시도에서는 잘 포착이 안 된다는 것이다. 주로 가스통을 들고 집회장에서 설치거나 고독사, 자기계발 등의 뉴스 사회면에서만 오르내릴 뿐 이들에 대한 정교한 분석은 아직 시도되지 않는 것 같다. <속물과 잉여><잉여 사회>에 나오는 잉여의 경우도 주로 인터넷을 통한 잉여 문화로만 이야기되고 있는데, 좀 더 폭넓은 속물/잉여의 지점을 포착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방법은 그래도 문학이 아닌가 싶다. 혹시 그 점에 대해 얘기해줄 수 있을까.
소영현 : 청년 세대의 잉여와 속물에 대해 잠깐 언급하자면, 청년 세대가 미래 기수였던 시절에서 아무리 멀리 벗어났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청년 너희들에게 미래가 있다'는 논의가 먹히는 시대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다. '난 부모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는 의식이 먹혀드는 시대에서, 지금은 '잘해 봐도 부모 정도만큼은 살 수 있을까'라는 의식의 시대인 것이다. 외부에서 보자면 굉장히 수동적으로 보일 수도, 체제 안에 들어가려는 욕망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걸로 보일 수도 있다.
김수환 선생이 말씀하신 청년 세대의 공통 감수성에 대해서는, 요즘 들어 그 정체를 파악하는 게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부모 직업이라든가 거주지, 경제적 수준 등이 개인의 취향에 관여하는 것이지 공통의 무언가가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자신이 없어진다. 이젠 '청년 세대'라는 구획으로 잡히는 게 아니라 비정규직이냐 아니냐로 더 명확하게 잡히는 게 아닐까. 다른 사회적 집단과 같이 논의될 수 있는 장에 청년들이 흩어져서 쪼개져서 들어간 건 아닌가 싶다.
김수환 : 김홍중 선생이나 심보선 선생, 엄기호 선생, 서동진 선생 등이 속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흥미롭게 읽었고, 다만 귀여운 속물/동물적 실존의 두 틀로 한 세대를 규정지을 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의식은 계속 있었다. 이미 <88만원 세대>(우석훈·박권일 지음, 레디앙 펴냄) 이후에 세대론의 비판이 많이 나왔다. 주요 줄기는 세대 내 존재하는 계급적 차이를 왜 뭉뚱그리느냐라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세대마다 평균적으로 묶을 수 있는 경제적 근거가 성립했는데, 지금은 세대 내 양극화가 더 심하다. 그런 의미에서 세대론은 기본적으로 더 깊은 곳의 레이어를 모르는 척 하는 게 아니냐는 논의가 나왔다. 하지만 나는 청년의 공통 감수성이 계급이냐 세대냐 한쪽보다는, 그 두 축의 진동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 시대 진정성의 의미
프레시안 : 그렇다면 잠깐 이야기를 돌려, 속물의 안티테제로서의 진정성에 대해서도 얘기해보면 어떨까. 최근 '진정성'이라는 단어는 김홍중 선생과 심보선 선생이 말하는 진정성의 의미와는 많이 달라진, 아주 고리타분한 어떤 태도라는 식으로 냉소와 함께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87년 이후 세대들, 특히 2000년대 들어오면서 예전만큼 자신의 삶이 서사화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더 이상 큰 이야기를 원하지도 않고 큰 이야기가 불가능하다고 믿는 그들이 손쉽게 유희적인 잉여질을 선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980년대에는 진정성이 가능했던 외부적 조건들이 있었고, 지금에 와서는 나를 중심으로 한 그런 거대한 서사가 구축될 수 없다는 얘기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 분명 거대한 충격들을 우리는 연달아 경험했다. IMF, 9.11 테러, 2008 금융 위기,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 용산 참사 등. 거대한 사건을 연속적으로 맞닥뜨리고 있는데 왜 나와 세계가 맺는 관계는 진전되지 않고, 진정성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고, 주체적인 서사화의 욕구 자체가 사라진 걸까.
심보선 : 두 가지인 것 같다. 먼저 국가가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표상되느냐의 문제가 있다. 과거 청년 문화라는 포괄적 의미에서 저항이 가능했던 이유는 국가라는 권위적인 체제, 거대한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버지를 죽여라'는 '국가와 싸워라'와 닮았다. 이렇게 살라고 지시 내리는 권위적인 국가/아버지가 있었고, 청년 문화는 그에 대해 반발하며 생겨난 공통의 감수성이었다.
하지만 9.11이나 IMF는 권위의 붕괴가 아니었다. 9.11은 민주주의 대 독재국가, 혹은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에서 촉발한 사건이 아니다. 그건 테러, 공포다. 그때부터 문제되는 것은 개인의 안전이다. 경제적 사건이 불러일으키는 공포 역시 안전의 문제로 귀결된다. IMF를 어린 시절 경험한 세대들은 그걸 트라우마라고 이야기하더라. 나이 들어서 IMF를 경험한 사람들은 보다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지만, 어릴 때 경험한 사람들은 갑자기 집안 분위기가 달라지고 아버지가 이상해진다는 감각으로 이해한다. 내가 집 없이 살 수도 있구나, 라는 불안의 감각이다. 오로지 우리 가족, 아버지, 사적인 문제가 되는 거다. 그렇게 체험된 불안과 공포 속에서 자기 인생을 보게 된다. 아까 이야기한 모든 사건의 핵심은 사적인 삶의 위기다. 그때 국가의 역할은, 기업과 마찬가지로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된다. 즉 적으로 인식했던 권위가 사라지고, 이제 내 안전을 보장하거나 나를 관리하고 케어하는 시스템만 남은 거다.
바우만도 비슷한 얘길 했는데, 거기서 개인에게 남는 건 지극히 심리적인 불안의 문제이자 내가 루저가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만약 잉여질이 공통의 감수성이라고 했을 때, 내가 안전하냐 아니냐라는 불안과 싸우고 대적하는 과정에서 어떻게든 그걸 다루려는 시도가 아니냐는 생각은 하고 있다. 나는 속물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 없지만 나는 잉여다, 라는 선언은 많다. 자기비하인 동시에 방어기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김수환 : 내가 말한 그 의외로 폭넓은 잉여 감수성이라는 건,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범위 내에서는 냉소와 유희라는 중요한 특징을 가진다. 냉소는 진정성의 포스트 세대의 특징이 되어버렸다. 과거 선배들이 보였던 형태로 돌아갈 수도 없고 과거 선배들이 지금의 청년들에게 좋은 모습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 러시아 사상가 바흐친의 말을 빌리자면 '참칭'의 냉소와는 다르다. 그러니까 '난 이 모든 것들 바깥에 있다'라고 스스로를 포지셔닝하고 관찰자로서 던지는 참칭의 냉소는, 자신에게 존재의 알리바이가 있다는 듯, 자신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아까 내가 말했던 냉소는 좀 다른 종류다. 현실에 거리를 두고 '흥'하고 있지만, 나도 그 조건 안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게임이나 현실이나 다를 바 없다는 걸 아는 무거운 냉소라고 말하고 싶다.
두 번째 특징인 유희는 과거의 무거운 주체나 우울증을 유발하는 주체성과 다르다. 체제나 적에 맞서 같은 무게로 진지하게 임하는 게 아니라 그 무게를 계속해서 비워 가는데, 그게 꼭 과거의 방식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아니더라도 '다름'의 지점은 있다고 본다. 웹툰 작가 이말년 같은 경우, 절대 진지해질 수 없는 스타일인데 그의 인터뷰 중에 유일하게 진지한 대목이 하나 있다. 죽을 때까지 인생을 늬적늬적 살겠다고 하는 것, 그리고 만만한 만화를 그리겠다는 것.
무게 있는 냉소와 절대로 무거워지지 않으려는 유희라는 모순적 태도가 잉여 안에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모순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계속 이야기하는 속물의 전단계로서의 잉여, 혹은 사회경제적 조건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잉여와는 좀 다른, 긍정적인 잉여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심보선 : 하지만 그런 긍정적인 잉여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건가? 기존의 냉소와 다른, 새로운 저항으로서의 유희라고 얘기한다면 그거야말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대안 아닐까? (웃음)
김수환 : 그런 것들이 보여야 최소한 '적극적 규정'으로서의 잉여가 있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대안이 있냐고 묻는다면, 없다.
소영현 : 근대 초기로 올라가면 춘원 이광수 같은 작가가 각 잡고 '새로운 민족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청년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다른 한편에선 김동인 같은 '부랑청년' 작가가 등장하여 '너희는 정치를 하시든지, 나는 예술을 할 거야'라는 태도를 취했다. 그때의 청년 중 건실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청년 말고 좀 이상한 애들, 술 먹고 연애나 하고 생산성에 관심 없는 청년들이 새로운 사회를 열었다는 사후평가와 지금의 잉여/속물 논의가 자칫 비슷하게 들릴 수 있을 것 같다.
이건 반복일 수 있다. 이 세대에 특수한 것이냐, 아니면 늘상 반복되어 온 청춘에 대한 규정이냐를 논의해야 한다는 거다. 잉여질은 20대뿐 아니라 30대, 40대, 50대도 많이 한다. 아까도 말했지만 청년 문제를 '잉여'의 개념으로만 한정짓기보단 '비정규직 여부'와 같은 정치사회적 문제틀로 넓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수환 : 잉여를 시대론적 특징, 세대론적 특징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한 보편 특수 문제가 있는데, 문화적인 규정성으로서의 잉여성이나 '공통감각'이라 표현했던 잉여성을 이제는 경제적 조건으로 규정되는 어떤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이 부분에서 조심스러워진다. <속물과 잉여>에서도 '80년대 정치의 시대, 90년 문화의 시대를 거쳐 2000년대 경제의 시대가 다시 왔다, 뜬구름 잡는 문화-속물화된 정치가 아니라 구체적인 경제라는 물적 조건에 발 디디고 선 세대 의식이 나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최근 아파트 관련 담론도 그렇다. 너희들이 처한 경제적 물적 조건이 이렇다고 조목조목 제시해주고,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거기에 기반하여 욕망의 구조조정을 하라는 사고 말이다. 일견 동의하면서도 동의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
나를 규정하는 모든 종류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다 고려할 때 당연히 이렇게 하는 게 맞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조건들이 있다. 그 조건의 인과율에 벗어날 수 있는 0.1%를 갖느냐 못 갖느냐, 그게 내가 잉여들로부터 보고 싶은 잠재력이다. 그렇게만 보면 잉여는 청년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경제적 조건이 너의 모든 것, 너의 정신과 너의 성격과 너의 미래를 다 선규정한다는 건 시대감각이다. 아까 처음 속물 얘기할 때 나왔던, 경제가 모든 것들을 규정하는 최종 심급으로 등장하는 시대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틈을 비집고 나오는 인간의 얼굴을 어떻게 찾고 지지할 것인가, 그런 부분을 더 보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 모든 세상이 2 곱하기 2는 4라고 할 때 난 5라고 말할 수 있는 가능성 말이다.
날이 갈수록 그게 더 점점 절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걸 기대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청년 아니라면 또 누구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현실적 조건들을 당연히 냉철하게 고려해야 하고 그것에 맞는 전략을 짜 대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또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0.1%의 틈의 영역을 어떻게 찾고 지지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좀 다른 이야기지만, 지난 주 '프레시안 books'에 실린 노정태 씨의 <천국에서> 서평(☞바로가기 : "이태원 맥도날드에 와퍼가? '무서운 소녀'가 빚은 '거짓말'의 정체!")에 대해 그런 면에서 동의할 수 없었다. 세계와 세상을 구분했을 때, 난 세계를 정확하게 그리는 게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이 세계 안에서 어떤 조건에 처해있는지에 매달리기보다, 세계가 어떻든지 간에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은 좀 다를 수 있다는 0.1%를 이야기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냉소와 연대 사이
소영현 : 아까 얘기했던 냉소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다. 어떻게 보면 시니컬하게 보는 것이 크리틱하게 보는 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즉 사태 자체에 거리두기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분단 이후 한국 사회가 성찰 가능한 사회냐라는 질문을 늘 품고 있는데, 그런 면에서라면 냉소가 충분히 크리티컬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작년 대통령 선거 결과가 냉소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발가벗긴 것 같다. "네가 냉소하는 사이 세상은 이렇게 변했고 너도 사실상 동조자다"라는 지젝의 말을 거부해왔는데,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 말이 옳았던가라는 회의가 남았다.
'한국사회와 청년들-'자기파괴적' 체제비판 또는 배제된 자들과의 조우'에서 김애란의 소설 '성탄특선'(<침이 고인다>(문학과지성사 펴냄) 수록작)과 황정은의 소설 '양산 펴기'(<파씨의 입문>(창비 펴냄) 수록작)을 언급한 게 그 때문이었다. 크리스마스에 섹스할 곳을 찾아 모텔을 전전하지만 죄다 방이 꽉 찼다. 결국 아주 허름한 여관에 들어가는데, 그 옆방엔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여 자고 있었다. 또 철거민 노조 연합 집회의 구호의 목소리가 맞은편에서 양산을 파는 알바 청년의 호객 목소리와 뒤섞이게 된다. 의식하지 못한 채로, 그들이 그렇게 만나는 거다. 연대라는 단어를 감히 조심스럽게 쓰자면, 세대 내 분화되어 각자 잉여질하는 사람들의 연대, 굳이 '청년들'의 연대가 아니라 이주민이라든가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 고독사하는 사람과의 연대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닐까. 경제가 세상을 바꿨다? 80%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 외에 설명 안 되는 부분이 분명 있는 것 같다.
김수환 : 당위, 바람의 논리에서는 동의한다. 그런데 그들이 정말 사회적 타자한테 공감하거나 연대가 가능할까, 난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적대적인 경우가 더 많다. 문학에서의 그런 장면과 달리 현실에서 두 목소리가 섞여드는 건, 가장 힘든 연대의 고리가 그 고리 아닌가 생각한다.
소영현 : 당위가 아니라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밥그릇 싸움 때문에 연대를 못한다기보다, 하부의 하부구조를 계속 만들어내서 내부 싸움으로 돌리는 방식으로 하위적 존재들을 관리하는 한국사회의 통치 원리가 문제이지 않나.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연대야말로 유일한 가능성 아닐까.
심보선 : 아까도 언급했던 불안의 문제라고 보는데, 청년들이 다른 타자들을 인식하고 그들과 내가 같은 처지라고 인식하며 연대하긴 힘들다고 생각한다. 불안의 가장 큰 문제는 사실 경제적 조건의 변화, 시스템의 변화에 의해 야기된 심리적인 파티션이다. 사람들이 그 안에 갇힌다. 타자는 나와 접촉할 일 없는 저쪽 어딘가에 속하는 존재다. 그 타자의 이미지는 내가 직접 접촉하고 대화하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성적소수자나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이미지는 다른 어딘가에서 만들어진 것을 빌려와 내 방식으로 해석한 상이다. 그런 심리적 장벽에 가로막힌 상황에서 연대는 너무 힘들다.
일반적으로 심리적 파티션 안에서 나오는 담론은 긍정의 행복 혹은 자기계발이다. 그런데 다른 장에서 다른 행복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희망버스를 탄 이들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이, 내 파티션에서 한 발짝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연결되면서 뭔가 같이 하니까 행복하더라는 거다. 그 사람들이 이타심 때문에 희망버스를 탔다는 게 포인트가 아니다. '모두가 불안하다'라는 시대감각과 싸우다가 한 발짝 나간 거다. 다들 한 발짝씩 나가서 어디선가 만난다. 그 만나는 장에서 이뤄지는 게 0.1%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누구를, 무엇을 위한 연대가 아니라 그냥 같이 연결되는 것, '행복'이나 '함께'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 말이다. 그런 작은 공간이 가까스로 인간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난 그런 공간을 종종 본다. 가령 홍대에 이주노동자들이 만든 문화공간이 있다. 가구공장에서 일하며 이주노동자 운동에 뛰어든 방글라데시 친구가, 그곳에서 가구 워크숍을 연다. 한국 사람들이 그 워크숍을 들으러 온다. 워크숍에 온 사람들은 '사는 게 재미없어서. 뭔가 만들고 싶어서. 여가를 위해' 온다. 그럼 방글라데시의 노동자는 왜 워크숍을 할까? 그 사람은 "바깥을 봤다"고 표현하는데, 공장 안 노동자로서의 삶에서 한 발짝 앞으로 나온 거다. 어쨌든 가구를 매개로 이주노동자와 한국사람들이 만났다. 가구를 만들면서 그 이주노동자의 삶과 이력이 한국사람들에게 들려진다. 물론 이 사례는 예외적이고 0.1%의 가능성이다. 그런데 둘 다 동일하게 한 발짝 나갔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거다.
김수환 : 하지만 그 공통분모라는 게 가령 이주노동자가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과 저소득층 대학생이 몰리게 된 장소가 같아서 우연히 모인 건 아닐 수 있다. 어떻게 접속이 되고 연결될지는 사실 모르는 거다. 각자의 지점에서 어떻게든 공통감각끼리 연결되면 아주 작은 규모, 서너명이라도 뭔가 생겨나고, 거기서부터 이전의 내가 아닐 수 있는 0.1%의 가능성이 생겨나지 않을까. 사사키 아타루였나, 내 속에서 예상치 못한 게 나왔을 때가 인생의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라고 썼다. 그런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이런 의문도 든다. 세계와 내가 일 대 일로 대결하는 건 옛날 모델이다. 마치 <지하생활자의 수기>처럼, 세계가 어떻게 되든 난 거기에 100% 규정받지 않겠다는 자세가 근대적 의미의 성장소설 모델이었다. 세계와 불화하면서, 세계가 날 뭐라 규정하든 내 속에서 뭔가 다른 걸 만들 수 있다는 것. 지금은 그게 될까? 힘들다고 본다. 그렇다면 지금은 혼자 어깨에 세계를 짊어지는 모델이 아니라, 같이 무게를 지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80년대식 자세, '어깨 걸고 다 함께 정신과 몸을 일치시키자', 이건 아니다.
각자가 0.1%를 위해 한 발 나서는데 서로 간에 어떤 식으로든 도움 되는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공동체를 정말로 찾을 수 있고 그런 공동체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느냐….
함께, 연결하자
심보선 : <속물과 잉여> 등에서 언급하는 잉여질 외에도, 이 시스템이 야기하는 불안과 질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또 다르게 수많은 잉여와 들끓음이 있다. 그 잉여질 속에서 온갖 교차로가 있고, 그중 어떤 잉여질에는 속물성이 발견되고 또 어떤 교차로에서는 낯선 사람들이 모이고 만난다. 예측 불가능하다. 여전히 '내'가 얼마나 가치 있고 우월하냐를 둘러싼 전쟁이 일어날 수 있고, 또 어떤 잉여질은 그저 관조-아무 것도 안 하는 걸 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김수환 : '기안84'라는 작가가 그리는 <패션왕>이라는 웹툰이 있다. 언젠가 이 작가가 무려 12시간 이상 늦게 그날의 연재분을 올린 적이 있다. 그때 댓글 수가 3, 4만까지 치솟았다. 처음에는 "얘는 이제 프로 만화가가 아니다"라고 막 욕하다가, 몇 시간 지나니까 댓글 다는 사람들끼리 어떤 공동체를 형성하는 신기한 현상이 벌어졌다. <패션왕> 이번 회가 언제 올라오냐는 이미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고, 낯선 사람들끼리 서로 뭐하냐고 묻기 시작했다. 너나 나나 참 병신 같은 짓을 하는구나, 라는 친밀감이 발생하면서 그 속에서 예상치 못한 고백 서사가 나온 거지. 굉장히 공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점점 내면을 토로하게 됐다.
난 그걸 과도한 열정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멈춰야 하는데 정도 이상을 초과한 거잖아. 그런 사람들이 오타쿠의 공동체 문법을 만들기 마련이다. 모두가 바빠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회 속에서, 하다못해 학원을 하나 더 다닐 수 있는 시간에 굳이 가구 워크숍에 참석하는 개인들의 과도함은, 합리적으로 계산할 수 없는 영역이다.
심보선 : 합리적 선택도 아니고 경제적 보상도 아니고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가치도 아니다. 그걸 유일하게 설명해주는 것은 '벗어남'이다. 초과하는 말, 열정, 행동, 즉 과잉이다. 끝내야 하는데 계속 하니까, 자꾸 이상한 곳으로 가게 된다.
김수환 : 그런 과도한 열정이 모이면 일베도 가능해지는 거다. 그 안에서 존재의 함성뿐 아니라 존재의 의미, 희열도 있을 거다. (웃음) 그러니까 삶 속에서 어떻게 연결 지점을 찾을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해지는 것 같다.
심보선 : 인터넷 잉여질 말고 삶속에서 잉여질 하라는 뜻인가. (웃음)
김수환 : '같이' 하자는 거지. 한 명이라도 더 함께. 요즘 '힐링'에 대한 비판이 자주 들리는데, 난 꼭 동의하진 않는다. 맘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수다 떨고 나면 실제로 힐링을 받는다. 나쁜 힐링 같지 않다. (웃음) 그런 사람들을 조금씩 늘려가자는 것 정도? 그 외의 다른 어떤 것은…아직 모르겠다.
심보선 : 이게 자칫하면 '~해라'라는 말로 들릴 수 있어 좀 우려된다. 만약 뭘 해야 한다고 말할 만한 게 있다면, 난 사람들이 '이미 그걸 하고 있다'고 본다. 단지 그걸 지나쳐보내느냐, 붙잡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뭔가로부터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기쁨이 중요하거나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원래 궤도로 돌아가겠지. 그래서 단순히 '~해야 한다'라는 말보다, '각성해야 한다, 타자와 연대해야 한다'보다 '뭘 해야 한다면 그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정도가 최선이 아닐까.
김수환 : 예전 소비에트 시절, 달력을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원래 1주일 중 일요일만 쉬었는데, 이걸 5일 단위로 바꾸는 대신 교대근무를 하기로 했다. 휴일도 더 늘어나고, 공장 운영일도 늘고, 생산성도 좋아졌다. 그런데 1년쯤 지나고 나니 노동자들이 이 달력을 거부했다. 나는 노는데 내 동료는 일하기 때문에 같이 놀 사람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혼자 하는 잉여는 재미없단 뜻이다. (웃음)
심보선 : 그 때 시간은 잉여인 동시에 초과, 넘쳐나는 시간이다. 요즘은 그런 시간에 '접속'을 하지. 그럼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접속인가, 연결인가.
김수환 : 비록 접속이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연결'일 수 있는 지점이 있을 수 있다. 현실과 접점을 갖지 못할 때에는 말 그대로 접속의 공동체에만 머무르게 되고.
소영현 : 요즘 가장 고민인 건, 지는 게임이 너무 분명한 상황에서도 윤리적인 결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곳'에 취직한 애들이 비하면 난 실패한 것이라는 식의, 기준점인 단 한명을 빼고는 나머지는 전부 루저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게 이 세계의 논리 같다. 그래서 "인생 잘못 사셔서~" 이런 이야기가 스스럼없이 나올 테고. 그랬을 때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다. 세상을 바꿔야 이런 것도 바뀌지, 혹은 세상이 바뀔 수 없으니 난 그냥 잉여질할 거다. 요즘 들어선 "난 더 이상 이걸 하지 않겠어" 라는 식의 아주 작은 거부의 결단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심보선 :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안 하겠어'의 결단이 아니라 '못 견디니까 안 할래'인 경우가 많다.
소영현 : 맞다. 마음이 여유로워서 결단을 내리는 게 아니라 한 발짝 더 가면 죽을 것 같으니까 안 할래, 인 거다.
심보선 : 살기 위해서…그러기 위해선 두 가지 태도가 가능하다. 마지못해 사는 것, 그리고 조금 더 잘, 함께,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 소영현 선생은 그 후자를 윤리적 결단으로 표현한 것 같다. 그런데 난 윤리라는 단어에 의문이 간다. 옳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좋기 때문에 하는 것 아닌가.
소영현 : 동의한다.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게 너무 어렵기 때문에, 이건 하지 않겠다라고 빼는 건 조금 더 실현 가능하지 않는가라는 뜻이다. 지금 이 고민이 현재진행형이라 상세하게는 말을 못하겠지만…어떤 의미에서, 1960~70년대 한국사회가 행복 담론을 요청한 측면이 있는데 요즘 그게 돌아왔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일단은 여기까지만 말해두겠다. (웃음)
프레시안 : 세 분 모두 긴 시간 동안 다양한 이야기 들려주신 점 감사드린다.
- 김용언 기자, 안은별 기자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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