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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보고 듣기

대통령의 외국어

by 숲길로 2013. 11. 9.

 

박근혜 대통령께서 유럽 순방 중이시다. 예상 가능하게도 티브이 뉴스는 이를 매우 중요하게 보도했다. 그중 한 종합편성채널 뉴스는 박 대통령의 ‘외국어 실력’을 한 꼭지로 다루기까지 했다. 프랑스에 가서 프랑스어로, 영국에 가서 영어로, 중국에 가서 중국어로 연설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편집해 놓더니 급기야 역대 대통령들의 외국어 실력을 자료화면과 함께 언급한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전교조 불법화와 전공노 수사,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 등으로 나라 전체를 공안정국으로 만들어 놓고도 입 한 번 뻥긋 않는 박 대통령을 비판한 적은 없는 언론이 외국어로 연설하는 그의 모습은 그리 대견한가 보다. 외국 정상들이 한국에 와서 한국어로 연설한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엇보다 정말 듣고 싶은 것은 영어나 프랑스어가 아니라 박 대통령의 한국어인데 말이다.

 

대통령이 외국에서 그 나라 말로 연설하는 행위가 뉴스거리가 되는 일이 낯설지 않은 것은 그것이 한국의 전반적인 문화현상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야망에 찬 재벌 2세들은 반드시 미국이나 유럽에서 비행기를 타고 입국하여 영어로 ‘비즈니스’를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외국어 능력은 이들이 진짜 능력을 가진 인재라는 점을 보여주는 가장 구체적인 척도이다.

한국 대학은 국문과나 철학과를 없애면서 동시에 교수들에게 전면적인 영어강의를 요구하고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아이돌 그룹의 이름은 국적불명의 영어로 도배되어 있다. 일상 대화, 아파트 이름, 상품명, 상호명, 기업과 기관명에도 영어가 들어가는 것은 대세다.

 

동떨어진 듯 보이는 이런 현상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외국(어)에 대한 한국인들의 지배적 심리상태다. 어떻게 해서든 영어 등 외국어를 집어넣어야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이 심리는 한국인들의 집단적 인정욕구를 반영한다.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에서 인정받는 것에 대한 꺼지지 않는 욕구는 그들의 언어를 내 언어보다 더 ‘있어 보이는’ 것으로 만든다.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들과 그 국민들에 대한 멸시나 차별, 우월의식은 이러한 인정욕구가 불러낼 수밖에 없는 측면이다.

 

외국에 대한 인정욕구가 보여주는 하나의 진실은 그것이 결국 ‘강한 자’에 대한 숭상이라는 점이다. 언어든 정치제도든 문화든 상관없이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우월한 나라들은 대개 우리의 문제점을 수정하기 위한 참조점으로 기능한다. 반면,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뒤떨어진 나라들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색적인 문화의 장소로 언급될 뿐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강한 자’에 대한 숭상은 내부에서도 작동한다. 강남과 강북, 서울과 지방, 표준어와 사투리, ‘인 서울’ 대학과 ‘지잡대’(지방대를 낮춰 부르는 말), 정규직과 비정규직, 영남과 호남, 정상인과 비정상인 등 익숙한 구별은 모두 힘의 강약과 관련된다. 특히 삶 자체가 생존경쟁이 된 시대에 승리하고 성공한 자, 그래서 강한 자에 대한 동경은 더욱 강력해진다. 그것은 역사도 정치도 정의까지도 초월한다.

 

얼마 전 서울에서는 지제크와 바디우 등이 참석한 ‘코뮤니즘’ 행사가 열렸다. 당대 철학자들이 서울에 와서 펼친 ‘코뮤니즘’의 향연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고무적인 행사였다. 오늘, 10만명의 당원, 6명의 국회의원을 가진 통합진보당은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종북세력으로 낙인찍혀 해산되기 직전이다.

강남 한복판에서 자유롭게 철학의 향연을 펼치는 ‘코뮤니즘’과 일순간 반국가단체가 될 지경에 놓인 ‘공산주의’의 차이는 무엇일까?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코뮤니즘’과 ‘공산주의’라는 언어의 이미지, 그리고 강자의 철학과 약자의 이념에 대한 우리의 이중적인 태도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 문강형준 / 문화평론가 ⓒ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