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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보고 듣기

사랑은 왜 아픈가

by 숲길로 2013. 8. 3.

 

2013년 한국, 인터넷 상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치료'가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병원을 찾아야 할지가 분명한 신체적, 정신적 증상은 나타나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아픔을 털어놓음으로써 치유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랑의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솔깃해 할 만한 제목의 책이 최근 출간됐다. 에바 일루즈의 <사랑은 왜 아픈가>(김희상 옮김, 돌베개 펴냄)다. <감정 자본주의>(김정아 옮김, 돌베개 펴냄)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여성 사회학자 일루즈는 이번 책에서 방대한 양의 텍스트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현대적 사랑'의 특징과 사랑이 고통을 주는 '구조적 이유'를 조망하려 했다. 그녀가 가져온 자료 안에는 우리가 웹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애 상담란의 내용도 포함돼 있다.

 

                                                  ▲ <사랑은 왜 아픈가>(에바 일루즈 지음, 김희상 옮김, 돌베개 펴냄). ⓒ돌베개 

 

 

그러나 일루즈는 사랑의 실패 원인을 개인의 잘못에서 찾는 인터넷 '민간요법'이나 정신분석 혹은 심리학적 치료, 그것을 당연시하는 분위기에 비판적이다. 저자는 "정신분석과 심리 치료는 개인이 주절주절 자기 이야기를 떠벌이게 만드는 기술들의 가공할 만한 무기고를 장만해놓고는 결국 사랑의 고통을 피할 수 없게 스스로 책임지도록 만들었다"고 비판하며 '구조'를 들고 온다. 사랑의 아픔이 "사회라는 제도의 질서로부터 강제된 것임을 명확히 직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한편 "마르크스가 상품을 가지고 했던 작업을 사랑으로 해보"려는 야심의 산물인 이 작업은, 사랑의 의지를 이루는 구조가 '현대'에 들어와 커다랗게 변화했다는 가설에 그 핵심이 있다. 뒤집어 말해 "성인의 영웅적 행위"도 "신의 율법이 보장해주는 든든함과 정연한 질서"도 없이 개인이 끈 떨어진 연처럼 남루한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현대를 관찰하기에 '낭만적 사랑'만큼 흥미로운 안경이 없다는 얘기다. 여기서 '낭만적 사랑'이란 물론 사랑의 여러 갈래 중 하나인 이성애를 말한다.

 

생각해 보자. 세상 어떤 비극보다 '내 감정'이 앞서는 연애의 순간, 누가 더 매달리는가를 둘러싼 권력의 쟁투, "서른이 넘기 전에 결혼은 할는지"라는 걸그룹 노래 가사처럼 관계에 대한 약속을 받지 못할 때의 불안함, 선택과 책임의 무한한 '자유'가 열린 결혼시장, 섹시함이 이 시장의 절대화폐가 된 상황을. 저자에 따르면 이는 모두 20세기의 후반 40년 안에 새롭게 나타난 특징들이며, 우리가 사랑을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주된 원인들이다. <사랑은 왜 아픈가>는 이것을 실증함으로써 개인에게 지워진 과중한 부담을 덜어내고 아픔을 경감시키려는 학문 외 목적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프레시안 books'와 정혜윤(CBS 라디오 PD·작가)이 함께 하는 월례 행사 '우리 더 잘 살아요' 열 번째 시간에는 이 책, <사랑은 왜 아픈가>를 가지고 여성학자 정희진(<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펴냄) 저자)과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정희진은 이성애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원동력이라는 기존 페미니스트들의 원형적인 비판에서 시작해 책의 장점과 한계를 두루 지적하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갔다. 지난 7월 15일 저녁에 열린 행사에서 나온 주요 쟁점과 답변을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

 

'여자'들의 '사소한' 주제?

 

정혜윤 : 얼마 전에 <모던 하트>(정아은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라는 소설을 재미있게 봤다. 주인공은 30대 후반의 여성 헤드헌터인데 학벌이 낮다. 이 여성이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발버둥치는 모습을 통해 연애나 사랑이라는 게 서로 간에 믿음과 약속의 문제만이 아니고 사회와 계급 재생산의 모든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사랑은 왜 아픈가>는 어쩌면 그 소설의 주인공이 꼭 읽어봐야 할 책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사랑을 하면서 흔히 묻는 내면의 질문들 - '왜 나만 참고 살아야 해?' '사랑에도 권력관계가 있는 거야?', '안정된 미래를 약속하기 싫어?' '너한테 쏟아 부은 게 얼만데' - 이 있다. 마음이나 약속을 주고받는 것 자체가 자유 시장 경제모델과 닮아있는 것이다. <사랑은 왜 아픈가>는 이런 말들이 어떤 뜻인지를 촘촘하게 분석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정희진 선생은 어떻게 읽었는가.

 

정희진 :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여성학자라는 이유로 연애·결혼 문제를 상담하러 온다. '여성학=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본질적으로 사회와 정의에 대한 담론이지 남녀관계에 대한 담론이 아니다. 물론 섹슈얼리티, 사랑, 가족 등을 포함해서 이야기하지만 학문으로서 기본적인 목적은 사회와 정의를 다루는 데 있다. 그러나 그것을 구조적으로 분석한다고 보기 보다는 인상비평으로 접근되는 경우가 많고, 나아가 여성과 관련된 정책들은 더 심하다. 그래서일까, 이 책과 같은 이슈를 다루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나는 국제정치를 공부하는데, 너는 사랑 타령을 하고 있느냐'라는 일부 남성 학자들의 시선이 있다. 이걸 넘어서야 하는데, 내게도 콤플렉스나 망상이 있는지 의식적으로 회피해 온 경향이 없지 않았다. 이른바 학문에 있어서의 성별 분업이다.

내 경우 석사논문은 가정폭력에 대해 썼고, 박사논문은 자주국방에 대해서 썼다. 그런데 후자 같은 경우, '네가 감히'라고 나오는 사람들이 많다. 반대로 남성 학자가 가정폭력 같은 '여성의 이슈'로 여겨지는 주제를 다루면 다들 박수를 친다. 그게 참을 수 없었다. 프란츠 파농이 말한 것처럼 제국주의자들은 자기 언어만 하면 되지만, 식민지 사람은 지배자의 언어와 자기 언어까지 2개의 언어를 해야 한다. 여성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베버부터 프로이트까지 다 알아도 사소한 학문이라는 평가를 받는 한편, 단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여성학을 '건드리면' 유식하다고 간주된다.

 

사랑이라는 주제가 덜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은 현대인의 인생과 일상을 지배하는 정치이자 가족, 국가, 사회 구성의 핵심 장치임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여성 문제'로 취급되어 왔다. 그리고 이것을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학문의 분야로 끌어온 게 여성주의의 업적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의 사랑은 '주님의 사랑', 모성, 이데아 등을 아우르는 개념이 아니라 흔히 말하는 '연애'다. 마르크스가 노동과 당파성이라는 문제를 처음 철학적 주제로 제기하고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제기한 것처럼, 그래서 그들 이후로 후속 연구의 가지가 뻗쳐져 나가는 것처럼, 페미니즘은 인류가 한 번도 학문적 언어로 개념화하지 않았던 것을 주제로 가져와 연구의 싹을 틔운 셈이다.

 

여성주의는 동물행동학부터 신학, 정신분석학에 이르는 온갖 학문을 아우르는 다학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고,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통합하려는 시도였으며 애초부터 학제의 벽을 깨기 위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이 아쉬운 것은, '사랑은 오롯이 개인의 영역, 그래서 해결도 심리학의 영역'이라는 만연한 이데올로기를 의식하고 비판하다보니 '사회학'이라는 분과 학문을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점이다. 문제는 관점이지 분과 학문 자체가 아니다.

 

연애도 노동이다

 

정희진 : 여러분은 자본주의를 작동시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엔진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내가 생각한 답은 가족제도다. 가족이야말로 세습과 계급 재생산에 있어 가장 중요한 도구 아닌가. 한편 가부장제라는 이데올로기를 작동시키는 것은? 이성애와 가족제도다.

 

기존의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이처럼 남녀 간의 사랑, 즉 이성애와 그 관계 속의 성 역할이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동시에 작동시키는 것으로 보고 이성애 제도에 대한 비판을 제기했다. 이들 입장에서 보면 성역할-이성애-결혼-성매매-성폭력이 연속선에 있기 때문에, 앞의 것이 정상 규범으로 여겨지는 이상 범죄나 비정상으로 취급되는 뒤의 것이 해결하기 어려운 모순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왜 아픈가>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70년대에 활동했던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했던 선언이다. 다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풀어 썼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핵심 메시지 중 하나는 사랑 역시 노동이라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나온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이 책의 직접 제목을 붙인다면 <이성애의 정치경제학>이라고 했을 것 같다.

 

일부일처제 역시 정치경제학적인 구조의 산물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일부다처제를 비윤리적인 것, 끔찍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일부일처제는 남성의 재산을 자식에게 안정적으로 물려주기 위한 작동 원리로, 노동 시장에서 남녀의 조건이 같아야 성립되는 제도일 뿐이다. 그래서 일부다처제는 여성에 비해 남성의 재력이 그들을 여럿 '고용할 수 있을' 정도로 월등할 때 가능한 사회복지 제도가 된다.

 

정혜윤 : 지금 한 얘기, 즉 연애도 노동이라는 관점은 소설가 정이현이 90년대에 발표한 소설들에 종종 나온다. 어느 여자 주인공은 자신의 순결을 결혼시장에서 희소한 여자가 될 수 있게 만드는 보험으로 여기고 누군가를 사귀어도 인터코스를 허용하지 않는다.

 

▲ <아내가 결혼했다>(박현욱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정희진 : 그것과 정 반대에 있는 것이 영화이자 소설인 <아내가 결혼했다> 아닌가 싶다. 예전에 이 작품을 가지고 세미나를 진행했는데 모두 굉장히 분노했다. 여자 주인공이 "내가 별을 따달라고 했어, 달을 따달라고 했어. 그저 남편 하나 더 갖겠다는데"라고 말하는 걸 힘 있는 것처럼 묘사해 놨던데, 이 집에서 살림하고 저 집에서 살림하는 게 무슨 힘인가.(웃음) 여성이 양쪽에서 노동하는 것을 연애의 권력이라고 미화하면서 작가만 그렇게 생각하는 여성주의를 구현한 셈이다.

 

어떤 것의 본질이 노동인데 그 노동을 비가시화하는 예는 이 외에도 많다. 이를테면 모성을 엄마라면 누구나 갖는 것처럼 당연시하거나, 고양이가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을 따르게 하기 위한 엄청난 헌신 역시 무화시키는 서술들 말이다. 이런 것에 신경 쓰기 시작하면 행사에 가서도 행사 자체보다는 물은 누가 나르는지, 설거지는 누가 하는지, 스태프들이 고용된 건지, 학생이라면 학점은 인정 되는지만 궁금해 하게 된다.(웃음)

 

비대해진 나, 자기통치하는 나

 

정혜윤 :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열쇳말은 '자유'와 '자아'다. 저자는 현대의 사랑을 과거의 그것과 구분하면서 뭔가 '현대적'인 요소가 등장했다고 말하는데, 그게 바로 자아다. 사랑의 아픔은 '나, 나, 나'가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기 때문에 생기는 고통이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가장 심오하게, 최고로 성스럽게 여기는" 현대의 규범인 '자유'를 문제시한다. 자유에 대한 숭배가 경제 영역에서 불안과 양극화라는 파괴적 결과를 낳을 수 있었던 것처럼 개인과 감정, 섹스의 영역에서도 어떤 문제를 일으켰는지 검토해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하실 말이 있을 것 같은데, 부연 설명을 부탁한다.

 

정희진 : 드러내 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저자는 9.11 이후 변화한 자본주의의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변화한 자본주의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패러다임 속으로 들어온 자기통치의 논리로서의 자본주의다.

 

1600년대 일본의 에도 시대에 직업의 개수는 불과 530개였다고 한다. 그런데 1920년 일본의 자본주의가 최고로 발달해 전쟁을 준비하던 시점에 그 숫자는 무려 19만 개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로부터 85년 뒤인 2005년에는 몇 개였을까? 3만 개라고 한다. 6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가 돌아가기 위해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지는 않다는 얘기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80퍼센트는 없어도 되는 인간인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이런 이들을 잉여, 낙오, 쓰레기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를 정치신학적으로 풀어 쓴 게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실상과는 정반대로 이만큼 개인이 중요해진, '나'라는 것이 비대해진 시대도 없었다. 누구나 고등교육을 받으며, 시험이 쉽게 나와 몇 명이고 만점을 받는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좋은 대학을 거쳐 대기업에 들어가도 서른넷이면 회사에서 잘린다. 거기다가 웬만한 인간의 기대수명은 90세를 넘어버렸다.

'너는 자본가', '나는 노동자'라는 구획도 녹아 없어진 지 오래다. 그래서 '자본으로부터도 소외되고 노동으로부터도 소외된 노동자'란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프레카리이트(불안정 노동자)'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있을 곳이 사라진 상태, 노동자 대다수가 소속이 없는 상태다.

예전에는 기타를 잘 치는 애도 있고 공부를 잘 하는 애도 있었다면 지금은 한 사람이 이 모든 걸 다 한다. '엄친아'니 '알파 걸'이니 하는 애들이다. 나머지에게는 자아실현 할 공간이 없다. 다시 말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잉여이고, 콘텐츠를 가진 극히 소수만이 그 사람이 게이든 이혼녀든 흑인이든 '가시화'된 상태이다.

 

정리하자면 국가와 자본이 이 '나'들을 통치했던 시절은 이미 지났고, 지금의 '나'들은 아무 관심 받지 못하고 방치되고 있다. 국가나 자본이 관심 갖는 것은 서태지 같은 사람들이다.(웃음)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자신 스스로를 통치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걸 자유라는 이름으로 부여받았지만, 사실 속성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랑은 현대 사회의 자기 통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제다. 현대의 사랑에서는 자아 존중감과 자아의 인정이 매우 중요해졌으며, 여기에서 매력과 인격의 자본화라는 현상이 나타난다. 모두가 소비의 주체, 외모의 주체로 길러졌기 때문에 자기가 대단한 줄 알고 그래서 괴로워진다. 이 괴리를 대체 어떻게 할 건가.

 

"현대의 사랑은 자아의 독특한 개성과 그 가치를 부단히 확인해주어야만 한다. (…) 여성들이 남편에게 끊임없이 칭찬을 요구하는 것은 '자아도취'에 빠진 인격장애나 '자존심 결여' 때문이 아니다. 이는 낭만적 관계라면 모름지기 사회적 인정을 제공해야만 한다는 원칙적 요구일 따름이다. 현대에서 어떤 개인의 사회적 가치는 그 경제적이거나 사회적인 지위의 직접적 결과물이 아니며, 자신의 자아로부터 길어 올려야만 하는 것이다." (232쪽)

 

이 모양 이 꼴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지구가 멸망할 날이 얼마 안 남았다.(웃음) 그 날짜를 누가 맞추느냐의 문제라서 나 역시 신도림역에서 많은 분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다.(웃음) 그렇다고 해서 초등학교나 군대를 다 없앨 수는 없지 않은가. '잉여'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틈새시장을 찾아서 뭔가 특이한 걸 하라고 조언한다.

 

그런데 괴로운 게, 이 메시지가 대기업이 말하는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와 맞닿아 있다는 거다. 내가 '제주도는 변방이 아니라 관문이다'라고 말하면, 국방부가 이것을 강정마을 침탈 논리로 쓰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처럼 전유되어 버린다. 페미니즘 자체가 '가장 페미니즘이 필요 없는 여자들을 위한 담론'이 되었다고 비판받는 이유도 이렇게 '어떤 식으로든 가장 쉽게 포섭되고 흡수되는' 특징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몰두할 것을 찾아라

 

정혜윤 : 요즘 사랑이나 연대, 공동체에 대한 담론이 많이 나오는 것 같다. 그런 책들은 위험에 처한 소비 사회에서 유일한 구원 투수는 사랑 아니겠느냐고 주장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희진 : 글쎄, 나는 사랑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과 가장 비슷한 단어는 교환 아닐까 싶다. 아니, 사랑보다는 교환을 기대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만일 누군가 내게 폭력의 정의를 묻는다면, 감정을 제도화하는 것이라 대답한다. 대표적인 게 가족이고, 동창회나 향우회 같은 모든 '정체성의 정치'들도 여기에 속할 것이다. 순간순간 변화하는 유목적 주체를 한 번의 경험이나 한 번의 감정으로 제도화하는 것이다.

연애와 사랑 역시 굉장히 특수하게 제도화된 관계 중 하나이다. 매 순간 변하는 감정을 제도화한다. 만일 사랑이 있다면 '순간'에만 있을 것이며, 그래서 사랑의 반대말 역시 증오나 무관심이 아니라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즉 '사랑한다'의 반대말은 '사랑했다'(과거형)이다.

 

이런 맥락에서, 흔히 이상적이라 이야기되는 의미의 사랑-언제나 아름답게 불타는 이성애적 사랑-은 없다는 얘기다. 물론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그건 두 사람이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일신우일신, 매력을 고취시켜야 가능하다. 게다가 여러 각본이 맞아야 한다. 그건 결코 쉽지가 않다. '잡은 고기에 먹이는 왜 주느냐' 하는 남자들도 있는 형편 아닌가. 그리고 대부분의 관계에서 사랑을 유지시키기 위한 노동은 여성에게 떠맡겨진다.

 

사랑이 '교환'과 비슷하다, 혹은 사랑보다는 교환을 기대하라는 말은 다름이 아니라, 누군가 내게 지식, 성적 쾌락, 보살핌(지지와 양육 등을 포함), 돈 중에 하나라도 준다면 그 관계를 성립시켜도 좋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이걸 가지고 기혼 여성들과 그룹 상담을 해봤는데, 남편과의 관계에 대입해 보니 받는 게 하나도 없더라는 여성이 많았다. 심지어 받지 못하는 데 그치지 않고 폭력이 일어나지 않으면 다행인 경우도 있다. 그래서 오해의 가능성을 무릅쓰고 차라리 실효적인 접근을 하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가부장제에서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관계의 무능력자가 될 수밖에 없다. 관계를 '잘 하는'사람이 너무 없지 않나. 주는 게 부족한 사람, 과잉인 사람, 삼투압이 안 일어나는 사람, 삼투압이 지나쳐 상대에게 녹아들어 자아를 구조 조정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인간관계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이를테면 고양이와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의 관계를 떠올려 보자. 고양이가 내게 무엇인가를 주기 때문에 나는 고양이의 털을 참고 화장실을 치워준다. 혹여 인간들과 관계를 맺기 어렵다면 신(神)이든 반려동물이든 물건이든, '범성애'라고 할 수 있는 관계를 맺으면 된다. 수간(獸姦)이라고 말하면 끔찍하게 느껴지지만, <미녀와 야수>도 일종의 수간 이야기라 생각한다면 '동물과 관계를 맺는다'라는 게 이상한 말이 아니다.

 

모성이라든가 기독교에 귀의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가장 안전하게 승인되는' 관계맺음이고 앞서 말한 '범성애'들이 그 승인 정도가 낮은 것일 뿐, 결코 패륜이 아니라는 얘기다.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꼭 형사 한 명 찍어서 그 사람한테만 인정받으려고 하는 범죄자가 있는데, 이걸 변태라고 보면 안 된다는 거다.(웃음) 정리하자면, 차라리 사랑 대신에 무엇인가에 몰두할 것을 권한다.

 

남자가 여자의 인정을 바라지 않는 이유

 

"엄밀히 말해 주인은 자율권을 갖는 노예에게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 변증법과 달리, 남자들은 여자의 인정에 별로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대로 여자는 남자의 인정에 목을 맨다. 사정이 이렇게 된 원인은 간단하다. 남자가 원하며 필요로 하는 인정은 다른 남자가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자든 여자든 필요로 하는 것은 남성의 인정이기 때문이다." (298쪽)

 

청중 질문 : 이 책에 여성은 남성의 인정에 목말라 하는데 남성은 여성의 인정을 원치 않는다는 얘기가 나온다. 난 의아했다. 우리 아버지는 평생 여자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고, 주변 남자애들을 봐도 머릿속에 그 생각밖에 없는 것 같다. 오로지 여자만 의식하고 사는 것 같은데….

 

정희진 : 개인적 차원에서 남성이 여성의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들이 '왜' 여자한테 인정받고 싶어 할지, 한 번 더 물어보자. 남자한테 가족이나 여자의 인정은 다른 남자와 경쟁하기 위해, 혹은 다른 남자들과 비교해 '정상성'을 갖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인정이다.

 

내가 하는 질문의 요지는, 이성애와 남성 연대(남성 간의 관계) 중 무엇의 힘이 더 세느냐는 것이다. 만약 이성애가 남성 연대보다 더 힘이 세면 그건 이미 가부장 사회가 아니다. 그러니까 이 인정 투쟁의 본질은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한 차원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인간의 '표준형'이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가리키고 있다. 비유하자면 한국인들이 미국의 인정을 원하지, 방글라데시의 인정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성애-남성 연대 사회에서 정상성의 기준은 남성이 얼마나 많은 여자에게 사랑을 받느냐다. 날 좋아해주는 게 '누구'인가 역시 중요한 문제가 된다. 만약 윤창중이 여러분을 좋아한다고 하면 자아가 고양되겠나.(웃음) 내가 다른 사람이 하는 행사면 안 올 텐데, 정혜윤 PD가 하는 행사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온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웃음)

그런데 남성이 남성 연대의 인정에 목을 매게 된 것이 '자본주의 경쟁 사회라는 구조 때문이다'라고 해버리면, '문제는 잘 알겠는데,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라는 구조적 분석의 한계에 직면한다. 어떤 예외들이 모여서 전복을 이루면 사회는 변하겠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예외'를 숨기고 정상으로, 구조로 돌아오곤 한다.

그러나 개인의 행위성 하나하나가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중요하다. 가령 예전엔 '연상의 여성-연하의 남성'이라는 커플 설정이 문제시되었다면 지금은 오히려 그게 대세인 것처럼, 혹은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임신한 친구는 학교를 그만두어야만 했지만 지금은 '리틀 맘'이란 이름으로 TV에 나올 수 있는 것처럼. 이는 모두 개인들이 예외를 만들어 내면서 조금씩 바뀌어 왔다는 증거들이다.

 

사랑은 권력투쟁이다?

 

정혜윤 : 나는 '사랑은 없다. 그와 가장 비슷한 건 교환이다'라는 정희진 선생 말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언제 한 번 길게 토론을 해보고 싶다.(웃음) 마지막으로 보통 연애 관계에서 말하는, 덜 사랑하는 사람이 권력자고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구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묻고 싶다.

 

 

▲ 영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 

 

정희진 :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의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2006)이라는 영화를 굉장히 좋아한다. 수많은 남자들에게 학대당하고 착취당해도 비참한 최후까지 피해의식을 갖지 않는 여주인공이 나온다. 모두에게서 버림받고 퉁퉁 불은 추한 모습이 된 마츠코가 강가의 중학생들에게 '늦었으니 빨리 들어가라'고 보살펴주는 장면을 가장 좋아하는데, 이 여자는 끝내 남중생들에게 맞아 죽는다. 이런 결말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보라고 권하는 영화다. 보면 내가 말하는 의미를 알 것이다. 사랑에 대해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정혜윤 PD 말대로 흔히 관계에서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 여겨진다. 하지만 나는 덜 사랑하는 사람이 권력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부러 감정적이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 쿨한 척 하는 사람은 오히려 불쌍한 자들이다. 쿨함을 숭배하는 문화의 산물일 뿐이다. 사랑은 권력투쟁이 맞긴 하지만 그건 현상일 뿐이지 본질은 아니다. 어느 목회자가 '인간들 중 가장 성숙한 사람은 사랑을 제대로 받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그대로라고 본다.

 

정혜윤 : 이야기를 들으니 <무산일기>(감독 박정범, 2011)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탈북자인 주인공이 노래방에 취업해 일을 하는데, 어느 날 주인에게 혼이 난다. 풀이 죽어서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가는데 창틀에 먼지가 보이니까 그 와중에 손을 뻗어서 먼지를 닦는다. 이 장면을 정말 좋아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뭔가 깨끗하게 해주고 싶은 부분, 손 대고 싶은 부분이 보이는 거다. 정희진 선생 말대로 사랑을 권력관계로 파악하는 것은 사랑의 본질과는 무관한 것 같다.

 

    

                                 -  안은별 기자(=정리)ⓒ프레시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