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렬한 기시감, 20세기적 구태의연....
이석기 의원과 통진당 모임에 대한 논란을 보며 느낀 감상이다. 그 모임 자체도 그렇거니와, 그것을 헌정사건화하며 이용하려는 권력의 작태와 호들갑스런 언론보도 또한 그러하다.
국정원이 흘린 듯한 사건 정황은 비교적 단순하게 정리가능해 보인다.
한반도 전쟁위기가 극도로 고조되었던 지난 봄, 통진당의 한 모임에서, 만약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할 거냐는 주제로 이석기가 강연을 했고, 주사파(자칭 자주파) 즉 북한의 이념을 추종하는 모임 참석자들은 당연히 북한을 도와 적극적으로 남한 주요시설을 공격해야 한다면서 구체적인 방법까지 분임토론했다.
흥미로운 건, 녹취록이라며 언론보도된 내용엔 ‘만약 전쟁이 나면’ 이란 대전제가 슬그머니 사라지면서, 모임의 성격과 논의 맥락이 확 바뀌었다는 점이다. (의도적인 생략과 오독의) 결과, 그들이 당장이라도 무장봉기를 하자고 획책한 꼴이 되어, 시대착오적 망상증 환자들의 우스꽝스럽고 황당한 음모 서사 한편이 탄생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사이비 종교집단의 집회 한토막 보는 듯한.
다시 원래의 맥락을 되살려보자. 전쟁이 나면 북한 편이 되어 빨치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밥맛없고 재수없는 ‘종북 빨갱이’들이 극소수겠지만 어쩌면 우리 이웃 중에도 있다. 그게 현실이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우리 대한민국 체제를 적대시하고, 기회가 되면 북한에 호응하여 남한체제를 전복하고 싶어한다. ‘전쟁이 나면’ 기꺼이 대한민국의 적이 되겠다는 그들... 국정원 푸락치에 의해 녹취된 저 모임 현장은, 그들의 눈물겨운 소망을 생생히 드러낸 일종의 신앙고백이자 격렬한 간증의 풍경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이며 지금은 전시도 아니다. (의도적으로 맥락을 왜곡하지 않는 한) 그들이 당장 무장봉기를 하자고 획책한 것도 아니다. 그들이 북한과 접촉했거나 지령을 받았다는 증거도 없다. 어쩌면 역대 독재정권이 낳은 사생아인 자생적 ‘빨갱이’일 게다. 자신이 태어난 그 시대에 여태도 집착하며 시대착오를 망상하는 불행한 영혼들...
자,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을 잡아넣어야 하는가? ‘빨갱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차없이 ‘우리’로부터 배제해야 할까?
그들이 아직 아무 짓을 하지 않았다면? 또 고작 했다고 보도된, 곧 전쟁이 날 거라는 (순진하기 짝이없는!) 정세판단으로 전쟁준비를 하자는 헛소리 따위를 (사형이 가능한) 무시무시한 내란죄로 처벌해야 할까? 허나 멍청함은 처벌할 게 아니라 가르쳐야 할 무엇 아니던가?
또 전쟁위기가 비록 북한과 미국의 무모하고 경솔한 치킨게임으로 고조되었다 하나, 우리 정부는 과연 일말의 책임도 없는가? 위기에 반응하는 일부 얼빠진 국민들의 망동만 보이고 스스로의 미숙함은 보이지 않는가?
국정원 개혁과 재보선 선거국면을 앞둔 공교로운 타이밍에 불거진 이 사건, 이제 시작 단계일 따름이다.
실로 이 문제는 민주주의의 성감대를 건드린다. 헌법 제1조가 명시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역시 헌법으로 보장된 사상과 양심과 종교의 자유,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다시 한번 곱씹게 한다. 종북몰이의 무책임한 수사로 동원되는 ‘자유민주’의 진정한 의미도 새삼 되새기게 한다.
그 얼간이들도 이 나라 국민이다. ‘빨갱이’를 자처하는 그 일부 국민은, 국가의 존재이유와 민주주의의 의미를 영원히 고민하게 만드는 우리 안의 타자다. 사려깊은 성찰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 우리 아닌 우리들이다.
이 사건의 전개와 처리가 한국사회 민주주의 수준을 가늠하는 시금석, 더 구체적으로는 (유신시대를 통해 통치를 배운) 박근혜 정권의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수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천안함 사건의 대응과 추이가 이명박 정권의 그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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