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 2012)
감독 : 이안
출연 : 수라즈 샤르마(소년 파이), 아르판 칸(성인 파이), 라프 스팰(작가), 아딜 후세인(아버지), 타부(어머니), 제라르 드파르디유(주방장)
안경에 안경을 덧쓰고서라도 극장에서 3D로 봤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황홀하고 아름답다. 과연 이안 감독이다.
(스포일러 있음, 영화 볼 거면 읽지 마셈)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와 양립할 수 없는 또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 두 이야기를 함께 들려주는 목소리가 있고, 글로 옮기기 위해 그 이야기를 듣는 귀가 있다. 어느 얘기가 더 낫냐고 목소리는 묻는데, 듣는 귀는 이야기의 의미를 궁금해 한다. 의미와 이야기 사이, 또는 사실과 이야기 사이에서 선택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의미의 바깥에, 사실보다 더 크게 존재한다. 그것 또한 '이미 일어났던' 것이며, 우리에게 보여진 것이다. 체감하는 몸과 함께 격렬히 흘러갔던 모든 시간이다.
이야기는 생명체와 같다. 휘황찬란 형광빛 발하며 밤바다를 유유히 가로질러가는 거대한 동물은 무슨 의미가 있어서 거기 있는가?
이야기 사라진 자리, 숙주를 놓친 그림자처럼 멀뚱멀뚱 떠도는 게 의미의 정체인지 모른다. 의미로 거(가)두어지지 않는 것, 그게 이야기의 우주이며, 자연의 무한(파이, π)이며, 파이가 파란만장 겪어낸 삶의 무한이다.
이야기가 태어나는 곳은 어디일까? 돌이킬 수 없는 죄의식의 심연일까?
그럼 먼저 어떤 구멍이 있었다,고 하자. 이야기는 거기서 태어난다. 태어난 이야기는 자신의 배후인 구멍을 감추며 스스로 확대재생산한다. 허나 어느 지점에서 돌아보면 기원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반드시 생겨나야만 했던 것, 그게 이야기의 운명이다.
한편, ‘이 모든 게 무슨 의미일까’라고 묻는 귀(聽)의 질문에 ‘그냥 일어났던 일인데 꼭 무슨 의미가 있어야 하느냐’던 대꾸, 그 또한 이야기의 운명이다.
선박회사 직원들은 그에게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을 캐묻지만, 그들 역시 이야기만 귀에 담아 간다. 그토록 궁금하던 ‘사실’은 이야기의 각주로 기입될 뿐 이야기를 배반하지 못한다.
거칠게 보면 이 영화 전체가, 이야기 또는 환타지의 존재 이유에 대한 장황하고 황홀한 변명이다. 이야기 없이 삶의 실재를 고스란히 떠안고 살아가는 게 과연 현명한 노릇인지, 혹은 그게 가능하기나 한지...
허나 그건 아니겠다. 동북아 유교적 현실주의 문화에서 자란 냉정한 합리주의자 이안 감독이지만, 쉽사리 계몽의 함정에 빠져들지 않는다. 그는 동서양의 가장 예민한 정서와 영역을 날카롭게 가로지르며 누구보다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던 거장이다. 동북아 현대와 부대끼다 서구 근현대를 종횡하더니 비로소 세상 어느 곳과도 닮지 않은 아대륙 인도에 가 닿았다.
영화 끝나기 십여분 전쯤, 한 소년의 우화풍 성장담 이야기틀은 일거에 전복된다. 근래 본 중 가장 강력한 반전이다. 앞서 말했듯, 하나의 평면적 이야기를 단숨에 입체화한다.
알겠다, 세상 모든 이야기는 범신론의 서로 다른 판본이란 것.
不仁한 자연의 무한이 위태롭고 섬뜩하고 아름답게 펼쳐진다. 우주적 장엄에 이른다. 끝없는 그 펼쳐짐이 자연의 무한을 응시하는 파이와 호랑이의 시선에 겹쳐질 때, 의미 이전의 이야기와,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신의 얼굴과, 오줌싸개란 배설동물에서 무한(파이 π)이란 이름을 지닌 존재로 나아가는 한 인간의 삶이 하나가 된다. 힌두적인 범신론이다.
파이는 말한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그의 눈에 비친 내 모습 말고도 뭔가 더 있었다고 믿고 싶다’고. 그게 뭐였을까?
호랑이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잠시 귀기울였을 것이다. 새로 만난 숲을 지나가는 바람소리와, 등 뒤에 쓰러진 파이의 뱃속 깊이 울리는 어떤 부르짖음 따위.
호랑이가 사라진 곳에서 이야기는 태어난다. 실재를 대신하는 자리가 이야기의 운명이다.
호랑이는 우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파이의 가장 강력한 실재, 망망대해 태평양을 횡단하며 대면한 우주의 모든 표정이 아로새겨진 신의 얼굴이었다.
대양의 표류를 끝낸 숲의 제왕 호랑이 얼굴에 힌두적 범신의 모든 표정이 담겨 있다면,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이며 물의 왕자인 고래는 대체 누구일까.
딸애는 고래를 지구상에서 가장 오랜 생명체로 믿고 싶어한다. 그들에겐 어떤 불변의 안정감이, 아니 초자연적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신비감마저 깃들어 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란 소설과 동명의 영화엔, 고래가 인간보다 훨씬 진화한 생명체로 등장한다. 은하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철거되는 지구를 떠나면서 개뿔도 모르는 인류에게 임박한 위기를 노래에 담아 전해 준다.
여기서도 그들은 마냥 신비롭다. 이 영화가 뿜어내는 에너지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물의 무한을 가장 설득력있게 전하면서, 진정한 물의 왕자답게 다채로운 표정의 물과 더불어 있다. (믿거나 말거나) 태고의 생명체 고래는 이전에도 그랬듯 앞으로도 오래오래 아름다울 것이다.
주인공의 이름이자 원주율인 파이(π)값은 무리수다. 둥근 원둘레와 곧은 직경 사이 길이의 비는 딱 끊어떨어지지 않는다. 파이의 말처럼 ‘모든 게 끝나도 뭔가 있는’ 관계다.
파이가 태평양을 가로질러 가듯, 원의 한 끝에서 가장 먼 다른 끝으로 나아가는 직선을 그어보자. 원을 정확히 양분하는 운동이 끝났을 때 원주율 π가 생겨난다. 둥근 수평의 대양을 가로지르는 항해(또는 표류)가 끝나면 이야기도 멈춘다. 그러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아니 비로소 이야기는 시작된다. 발설된 이야기는 소설가에게 이어지고, 선박사 직원들에게도 전해진다. 둥근 원처럼 닫혀 있으나 π값처럼 끝없는 이야기의 여정이다.
분명히 하자, 이건 π의 의미에 관한 게 아니다. 오줌싸개에서 파이로 자라난 소년의 상상력이고 그의 이야기다. 오늘 나는 끝없는 그 이야기들 중에서 파이 파텔 버전 한 편을 보았을 따름이다(아니, 이안 버전이라 해야 하나?)
그래서 이건 어쩔 수 없이 이야기(들)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를 포함해 세상 모든 이야기들이 태어나는 이유와 과정, 즉 이야기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다. 파이의 운명에 닿았을 때 그 이야기는 우주적 범신의 무한한 표정으로 빛난다.
전작 <테이킹 우드스탁>이 떠오른다. 환상과 환멸의 경계, 흔들리는 이성의 끈을 놓치지 않고 꿈꿀 수 있는 지평의 한계를 탐색하는 듯 아슬하고 즐겁고 유쾌했던...
이안 감독은 무심한 자연세계에 표정을 부여하거나 포착해 내는 데 능하다. 그의 영화들에선, 힘겹고 버거운 저마다의 인간사가 묵묵 아름답기만 해도 좋을 자연풍광들에 투영되면서 한결 먹먹한 현실로 부각되어 와 닿곤 했다. <브로크벡 마운틴>이 그랬고 <와호장룡>이 그랬다.
어쩌면 이 영화에선 자연의 그 무한, 세상 모든 경이의 근원이며 궁극인 바로 그것이, 인간사를 말없는 투영하는 배경이기를 그만두고 성큼 전경으로 나서는 듯하다. 그래서 영화의 수많은 대목들이 대책없이 황홀하고 치명적으로 아름답다(풍광묘사가 자연스러웠던 전작들과 달리 과도한 CG가 싫은 이들도 있겠다).
라이프 오브 파이’란 제목 역시 한 개인의 파란만장 서사가 아니라 바로 (생명)세계의 무한, 지금 이 순간까지 연면히 이어지는 장엄 자연사에 바치는 헌사가 되어 마땅할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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