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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책

<안나 카레니나>라는 낯선 기호

by 숲길로 2013. 4. 20.

 

들뢰즈를 비롯한 탈근대철학이 제기한 종요로운 문제의식 중 하나는 ‘나’에 집착하는 존재론을 깨는 것이다. 관건은 ‘나’라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나’를 아우른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고 ‘생성’이다. 그러므로 “너 자신을 알라고 한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은 의미 없는 명령이다. 우리는 창문을 열고 문밖으로 나설 때 비로소 영감을 얻게 된다.”(미셸 투르니에) ‘나’를 알려면 “문밖”의 ‘낯선 기호’(들뢰즈)와 부딪쳐야 한다. 그때 비로소 사유가 발생한다. 외부와의 마주침이 없으면 사유와 생성과 변화는 없다. 한국 사회의 힘 가진 자들이 씁쓸하게 보여주듯이, 아집에 사로잡힌 ‘나’만 남는다.

 

정신분석학에서 밝혔듯이, 인간은 원래 보수적이고 변화를 싫어한다. 새로운 몸과 마음을 만들려는 야무진 결심이 대개 작심삼일이 되는 건 자연스럽다. 익숙한 ‘내’ 몸과 마음과 결별하려는 실천은 고통스럽지만, 고통 없는 변화는 없다. 변화의 계기는 낯선 기호인 다른 사람과의 마주침에서 온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나’를 벗어나 외부의 입장에 설 수가 없다. 재현의 한계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내’가 남이 될 수 없다는 한계로 인해 변화의 계기가 주어진다. ‘내’가 생각하는 세계가 다른 이들의 그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 이런 자기객관화의 능력을 지닌 이가 성숙한 존재이다. 이것이 모자랄 때 독선이 생긴다.

 

카프카의 통찰에 따르면, 성숙한 이는 ‘나’와 세계의 투쟁에서 언제나 후자를 지지한다. ‘나’라는 좁은 우물 밖의 세계가 언제나 더 풍요롭기 때문이다. 다양하고 풍부한 사람들의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의 왜소함과 한계를 독자나 관객이 절실히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이 걸작이다. 걸작의 캐릭터들은 독자에게 낯선 기호이고 미지의 대상이다. 걸작을 읽거나 보면서 우리는 그런 캐릭터들의 말과 행동의 의미를 성찰하게 되고, 그 성찰은 자신으로 이어진다.

 

톨스토이 원작을 각색한 조 라이트 감독의 <안나 카레니나>가 좋은 예이다. 영화는 ‘낯선 기호’인 안나, 카레닌, 브론스키, 레빈이라는 미지의 대상을 어떻게 해독할 것인가를 관객에게 묻는다. 안나가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브론스키를 선택한 것은 단지 욕정의 산물인가, 아니면 인습에 대한 저항인가? 안나를 대하는 브론스키의 마음은 한결같은가, 아니면 변화하는가? 변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연극적 세계로 묘사된 귀족들의 삶에 대조되는 자연과 대지의 풍요로운 세계로 제시되는 레빈과 키티가 맺는 대안적 관계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이런 질문에 명쾌한 답은 없다. 낯선 기호를 해석해도 항상 잉여는 남는다. 그게 걸작의 세계이고, 우리의 삶이다. 관객은 이 영화를 보면서 이런 질문을 곱씹으며 자신의 생각과 삶을 성찰하게 된다. 특히 흥미로운 건 카레닌의 형상화이다. 영화는 유능한 정치가이지만 고루한 성적 인습과 종교적 관념에 사로잡힌 카레닌의 분열된 내면을 섬세하게 다룬다. 카레닌은 출세를 위해 사랑과 가정을 무시하는 속물만은 아니다. 안나의 자살 이후 자신의 아들과 안나와 브론스키가 낳은 딸이 어울려 노는 모습을 카레닌이 쓸쓸히 바라보는 엔딩은 인상적이다. 감독은 이 장면을 연극적 배치로 제시하면서 카레닌이 속한 세계의 한계, 혹은 우리가 살아가는 연극적 삶의 작위성을 드러낸다. 영화는 묻는다. 당신이 생각하는 사랑과 욕망과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물음을 품고 계속 답을 찾을 뿐이다. 그것이 걸작의 역할이다.

 

                                                             오길영 / 충남대 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