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시 (Poetry, 2010) 139분
감독 : 이창동
출연 : 윤정희 이다윗 김희라 안내상 박명신 김용택(시인) 황병승(시인) 최문순(국회의원)
이성 잃은 국가의 모습이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느끼며 많이 우울해지던 날 오후, 극장 어둠 속으로 달아나 궁금하던 영화 두 편 몰아본다.
아창동 감독의 <시>와 임상수 감독의 <하녀>.
기대는 늘 배반되는 법, 전자는 기대 이상이었고 후자는 기대 이하였다.
임상수의 <하녀>는 고 김기영 감독의 걸작 <하녀>의 리메이크다.
임상수 감독의 신랄함은 늘 인상적인데 이번에도 역시 깊이가 부족하다. 물신이 지배하는 21세기 계급 사회의 욕망과 풍경을 연극적인 형식으로 노골화했지만, 캐릭터는 상투적이고 복선과 은유를 감추지 못하는 이야기 전개는 단조롭고 허술해 보인다. 그래서 기름지도록 매끄러운 영상에도 불구, 내내 빈약하던 울림은 종내 앙상하게 흩어지고 만다. 지나치리만치 계산된, 보이는 매 장면이 영화의 전부다. 몰입 어려우니 불필요하게 친절한 대사들마저 거슬린다.
결국, 충격적이리만치 힘과 깊이 넘치던 원작과 비교하기엔 역부족이다.
다만 초반부 서울의 밤풍경 장면, 전체 이야기를 감싸는 유기적 맥락은 약했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빼어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이창동의 <시>는
시가 읽히지 않는 세상, 시가 죽어버린 세상에서 한 편의 시가 잉태되고 마침내 태어나는 자리를 촘촘하고도 담백한 산문 언어로 펼쳐 보인다. 함축 넉넉한 단편소설같다.
시는 오로지 아름다운 것이란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한 영혼이 죽음 앞에서야 깨닫는다. 아름다움을 향해 가는 삶이 비로소 시이며, 삶의 진실로 울려오는 아름다움만이 비로소 시로 올 수 있음을.
고통에 대한 공감과 죄의식은 <박하사탕> 이래 그의 오랜 관심사였었다. 윤리와 종교를 거쳐 미학에 다다른 그 성찰의 거울은 한결 부드러우면서 예민하다.
관객은 턱괴고 앉아 한없이 빠져든다. 미쳐 돌아가는 바깥세상 밀쳐내고 행복하게 몰입하는 두시간 이십분...
만 일 년이 지난 지금, 어쩔 수 없이 이창동 감독의 영화엔 그의 죽음이 짙게 어린다. 그래서일까? 깊고 낮은 목소리로 화해를 되뇌던 <밀양>을 거슬러 응축된 것이 폭발하던 <박하사탕>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마저 든다. 생존을 빙자한 공감 없는 죽음의 거래, 죄의식도 가책도 없는 비루한 삶에 대한 분노가 일렁인다. 햇살 아래 덧없이 빛나는 것들에게 달려가 부딪치며 흔들린다.
허나 몸은 무겁다. 스스로를 배반하며 지워나가는 몸, 마침내 고요히 사라질 몸 지닌 모든 것들에 대한 공감 혹은 연민... 아름다움이 태어나는 진실의 자리는 그 물결 어디쯤이리라. 꽃의 길과 몸의 길이 만나는, 허공도 지상도 아닌 그 자리.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시>의 탄생에 관한 영화다. 폭발하는 것은 없다. 표적 잃은 목소리는 때로 헤매며 안으로 잦아들고 사물과 풍경들은 자주 침묵한다.
문득 치솟았다 사라지는 목소리.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강물이 되어 고요히 적시며 흘러간다. 더욱 넓고도 깊게...
뱀다리:
이창동의 <시>가 깐느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다. 충분히 그럴 만해 보인다.
그런데 그 각본, 영진위의 시나리오 공모에서 두번이나 떨어진 것인데, 한 번은 빵점을 받았다 한다. 우리나라 문화부 산하 영진위에선 빵점짜리 각본이 국제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영화제에선 각본상을 받았다는 얘기다.
깐느의 안목이 후진 걸까? 현 정부 문화부서 인사들의 안목이 너무 높으신 걸까?
아니면, 코드 안맞는 이의 것이니 기냥 싫어서 빵점 준 걸까?
듣고보니 참 졸렬한 얘기라 졸렬한 마음이 다시 옮겨 놓는다.
아래는 영화에서 윤정희가 연기한 양미자의 시다.
전문을 옮겨본다.
아네스의 노래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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