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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책

허트 로커 - 타인의 시선 +

by 숲길로 2010. 4. 29.

타인의 시선


별 줄거리도 없는 이 영화가 두 시간 넘도록 관객의 심장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 타자공포의 독특한 변형이랄 수 있는 익명의 시선을 다루는 놀라운 솜씨 덕분일 게다. 타인(의 시선)은 지옥이라 했던 어느 철학자의 말이 이 영화에선 말 그대로 진실이다.


실제로 이라크전에서 미군을 가장 두려움에 떨게 했던 것은 의도적으로 과대평가된 정규군의 저항이나 있지도 않았던(!) 대량살상무기가 아니라 수많은 급조 폭발물들이었다고 한다. 그것들은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누구나 만들어 아무데나 놓아둔다는 점에서 가장 무섭고 위험한 적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그 전언의 실체를 집요하게 재구성한다. 확증 불가능한 ‘아무나, 아무데나’ 의 두려움. 천재적인 감독은 이 모호하고도 명백한 공포를 기막히게 표현한다.

급조 폭발물 해체 현장을 멀리서 지켜보는 수많은 시선들. 공포는 그 시선들 속으로 흩어진다. 잠복한 시선은 그러나 시시각각 움직이며 되돌아와 폭탄해체 현장 한가운데로 수렴한다. 중동인 특유의 움푹하니 깊고 검은 눈빛들. 한눈팔지 않고 지켜보는 저 수많은 눈빛들 중 대체 누가 이 상황을 지배하려는 테러리스트인가?

 

                

 

(감독의 의도대로) 공포는 관객마저 깊이 감염시킨다. 매번 다시 되풀이되는 폭탄 해체 작업이지만 매번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는 스릴과 서스펜스. 절묘한 시선의 배치와 활용으로 관객의 시선을 요리하고 긴장을 끌어내는 솜씨는 히치콕 감독을 연상시킨다. 어쩌면 그를 능가한다.

히치콕 역시 시선의 대가였다. 얼핏 생각나는 몇만 들어보자. 

본다는 사실 자체에 담긴 위험한 이중성을 다룬 <이창>,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분열된 의미와 그에 따른 공포를 실감케 하는 <사이코>, 낯설지 않은 날짐승의 문득 캄캄한 시선이 불러일으키는 전율과 함께 시야의 벽에 갇혀 서서히 질식해가는 두려움을 탁월하게 표현한 <새>, 보는 것에서 오는 전형적인 두려움 고소공포를 다룬 <현기증> 등등...

 

                       

 

시선은 그러나 일방으로만 날아가는 화살이 아니다. 타인은 서로에게 타인이다.

폭탄 해체 상황을 둘러싸고 지켜보는 이라크인들의 시선 반대편에는 그것을 추적하는 미군의 시선이 있다. 미군들이 보기엔, 위험해 보이는 시선들은 거의 맨눈에 식별되지 않거나 가시거리 바깥에 있다. 그래서 조준경을 통해서 자세히 본다. 그 쪽을 향한 총구와 함께 본다.

마주보는 두 시선의 의미는 명확해진다.

미군에겐, 폭발물 해체 상황을 지켜보는 이라크인들의 시선 자체가 공포다. 그 시선 가운데 범인이 있고, 폭탄이 쾅 터져버리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다. 침묵의 적개심들.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그 시선을 바라보는 미군의 시선은 그래서 불안과 공포와 적의에 가득차 있다. 늘 총구와 함께 향한다. 총구 자체의 시선이라 할 만하다. 대개의 경우 이라크인 시선의 정체는 - 범인인지 아닌지 - 끝내 확인되지 않는다. 의심스럽게 보였기에 살상되거나 제압되거나 감시되는 것이다.   

저 대치하며 교차하는 시선들 속에 이라크전에 대한 서로의 관점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잠재적 테러리스트 vs 이유 없는 공격자.

물론 이 역시 이데올로기적으로 은폐된 진실의 표면에 지나지 않기에, 이 영화의 정치적 함의를 비판하는 주장은 옳다. 다만 이해할 수도 화해할 수도 없는 침략자를 대하는 이라크인들의 표정을 가장 효과적이고 사실적인 방식으로 드러낸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초월 또는 중독


영화를 보며 떠오른 또 하나의 영화가 있다.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

제임스 중사가 커츠 대령을 연상시키는 탓만은 아니다. 밤하늘 붉게 물들이는 유조차량 폭발 상황도 <묵시록>의 기시감을 강하게 불러일으킨다. 닮아서 나쁜 게 아니라 오히려 흥미롭던 영화. 성급히 말하자면, <허트 로커>는 <지옥의 묵시록>에 대한 패러디처럼 느껴진다. 오마쥬가 아닌.

아래 글(중독 혹은 사물로 진화하기)에 담아야 마땅했지만, 맥락 찾지 못해 던져두었던 제임스와 커츠란 인물. 다시 함 보자.

(이전 기록 참고 : 지옥의 묵시록 - 존재의 심연 혹은 어둠의 심장)

 


 

아마 제임스는 소영웅의 이미지를 벗어버린 커츠다. 커츠는 전쟁의 광기 한가운데서 죽음의 공포를 넘어 버린 자였다. 그러나 제임스는 공포란 초월되는 것이 아니라 중독되는 것일 뿐임을 보여준다. 어쨌건 둘 다 죽음의 공포를 뚫고 들어가, 한계를 - 그런 게 있다면 - 넘어 마침내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그곳은 어디일까? 가책 없이 무엇이든 저지를 수 있는 선악의 피안, 혹은 폭탄과 더불어 노는 무념무상 사물의 세계?

커츠는 베트남 정글에서 어둠의 제왕으로 다시 태어났고 제임스는 이라크 사막 한가운데서 변종 인류로 태어났다. 패권적 문명과 전쟁이 그들은 낳았기에 서로 닮았지만, 서로 다른 시대의 자식인 그들은 또한 많이 다르다. 커츠가 정글에 사는 반문명의 괴물이라면 제임스는 PC방에 서식하는 게임 중독자 같다. 

중독된 자는 끝없이 게임을 리셋팅한다. 하나의 폭탄이 해체되면 또다른 폭탄이 그의 손길을 기다린다. 꿀을 찾는 나비처럼 폭탄을 전전하며 그는 죽음과 공포의 향기를 깊이깊이 들이마시며 삶의 활력을 얻는다.

 

 

몸은 정직하다. 견뎌낸 자, 살아남은 자들은 진화한다. 자신을 단련시키고 주조한 환경을 가장 닮은 괴물로.

앨드리지 상병은 욕을 퍼부었고 샌본 하사는 은근히 부러운 속내를 비쳤지만, 누가 알겠는가? 어느 날 문득 그들 또한, 잠시 스쳐갔던 그 중독의 짜릿함을 그리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

아마 그것일 것이다. 인간과 전쟁에 관해 감추어야 할 진실이 있다면.  

그러나 그것들은 거울이다. 사막의 모래처럼 부서져 내리는 문명의 거울이다.

시야 가득 쌓여있는 음식(시리얼) 앞에서 망연한 제임스. 문명과 진화의 이름으로 이룩한 오늘 이 곳의 풍경이 더없이 낯선 자, 돌아올 곳 없는 그는 이미 불귀(不歸)의 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