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허트 로커(The hurt locker) 130분
- 감독 캐서린 비글로우
- 출연 제레미 레너, 안소니 마키, 브라이언 개러티, 가이 피어스, 랄프 파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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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렬하고 건조하다. 기막힌 영화다.
- 상영관 나서니 흐리던 하늘이 말끔하게 개였다. 잠시 걸음 멈추고 바라본다.
- 창 너머 멀리 쏟아지는 햇살 속에 희게 빛나는 아파트 숲들. 번식과 소비의 폐쇄회로를 지탱하는 우리의 완강하고도 나태한 성채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 이란 말로 <전쟁론>의 저자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 지닌 윤리적 허울과 잣대를 물리쳤다. 전쟁관의 근대화였다. 이후 문제는 ‘정치냐 윤리냐’ 였고, 종래의 대부분 전쟁 영화는 충분히 정치적이거나 윤리적 관점을 지녔다.
<허트 로커>는 이제 일말의 정치마저 배제하는 듯하다.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이 작품이 “이라크전의 윤리 정치적 배경을 지우고 있다.”고 비판했다. 옳다. 그러나 이건 전쟁 영화라기보다 전쟁을 소재로 한 중독에 관한 영화다. 지워진 그 배경들은 전쟁의 미시 생태계로 흩어져 사라졌다가 가장 기이한 풍경으로 되돌아온다.
‘전쟁은 마약이다.’
연막을 뚫고 솟아나는 전쟁기계. 그건 어쩌면 우리가 진작 그 출현을 목도한 또다른 인류, 변종 신인류일지 모른다. 진화라면 진화다. 전쟁이 진화한 게 아니라 인간이 진화한 것이다. 전쟁이 낳은 변종 인류, 21세기 현대 미국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수컷들. 그러므로 전쟁은 또한 어쩔 수 없는 시대착오 현장이다.
그는 수퍼마켓에서 시리얼 고르는 게 폭탄 제거하기보다 더 어렵다. 사랑하고 낳고 기르고 소비하는 동어반복의 일상에서 삶을 느낄 수 없는 자들에게 아드레날린 없는 시공간은 불모다. 죽은 영혼의 것이다. 살기 위해 그들은 기꺼이 죽음의 공포에 홀린다. 중독된다.
그래서 전쟁영웅의 신화는 허구다. 스스로 연출한 이미지에 장엄하게 도취되는 의지의 화신 따위는 없다. 중독자와 예비 중독자가 있을 뿐. 소영웅 캐릭터로 썩 어울릴 법한 랄프 파인즈와 가이 피어스란 일급 배우들은 잠시 나타났다 허망하게 사라진다. 긴박한 그 상황을 지배하는 건 이름과 허세가 아니다.
전쟁이 치명적인 중독 현상임을 심장으로 입증하는 이 영화는 또한 중독자들을 위한 설득력 있는 변명 같기도 하다. 가령, 저런 대사들이 귀담아 들린다.
‘나이가 들면 좋아하는 것이 자꾸 줄어들게 된단다... 지금 내겐 단 하나 뿐...’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좋아하는 일을 했고 ‘죽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을 뿐이다.
중독은 특이하고 역설적인 생명 현상이다. 생명체 스스로 자기보호 기제를 무너뜨린다. 더 열렬히 살아있기 위해 죽음의 공포에 더 가까이 다가선다. 가장 위험한 폭탄 앞이라면 그는 방호복조차 벗어버린다.
변종 인류의 생태도감에서 남자와 여자는, 새끼를 낳고 싶어 안달하는 암컷과 달아나고 싶어 미치는 수컷일 따름이다. 여친이 애를 원한다고 고민하는 부하에게 그는 ‘정자를 줘 버려!’ 라고 내뱉는다. 서로 초점 맞지 않은 애증의 궤도 위에서 끝내 어긋나는 암컷과 수컷, 그러나 삐걱거리는 듯하면서 생사를 함께하며 더 긴밀히 호흡을 맞춰가는 수컷들의 수상쩍은 유대.
세 사내 사이를 흐르던 깊고 은밀한 연대감이 도드라지던 사막의 숨 막히고 지루한 저격 장면은 섬뜩하고 아름답다. 중독의 정서를 교감하며 마침내 사물의 경지에 이를 듯한 표정 위에 내려앉던 파리 한 마리...
이런 대목들 쯤에선 여성 감독의 눈에 비친 남성성에 대한 판타지란 혐의마저 강하게 걸어본다.
이라크전이 미국의 부당한 침략전쟁이란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 말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해서 영화를 비판하는 건 그리 온당치 않다.
이 영화는 이라크전을 빌어 감독 자신이 살고 있는 미국이란 나라에, 나아가 고도화된 소비 자본주의 현대 문명에 짐짓 총구를 겨눈다. 매우 새롭고 매혹적인 스타일의 영화 후경으로 하나의 딜레마가 떠오른다. 그리 낯선 건 아니다.
전쟁이란 치명적 중독의 풍경 이면에 펼쳐진 저 권태로운 문명의 얼굴, 번식과 소비의 무한궤도. 여성 감독 치고는 퍽 특이하나 여성이라서 가능한 관점인데, '전쟁은 다른 수단의 정치'라는 진실은 기어이 되돌아오는 셈이다.
오래된 전작 <폭풍 속으로> 역시 그러하지 않았던가? 황금만능의 시대 질서를 비웃듯 은행을 털며 목숨 건 서핑의 스릴에 중독된 눈부신 청춘들...
다시 보고 싶다, 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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