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더 문(Moon, 2009)
감독 : 던칸 존스
출연 샘 록웰, 케빈 스페이시(목소리), 맷 베리, 로빈 찰크
저예산 걸작이라 할 만하다. 다소 낭만적일 수 있는 달의 이미지에 만만찮은 윤리적 질문을 겹쳐놓고 밀도 있게 풀어낸 발상과 연출이 참 놀랍다.
우리말 번역 제목과 다른 원제목이 눈에 띈다. 달이란 단어가 일반명사(The moon) 아닌 고유명(Moon)이다. 영화를 보고 나니 이유를 알겠다. 아니, 적극 동의하고 싶어진다.
과학상식이 말하는 달. 스스로 빛나는 태양도 아니고 저만의 공전궤도를 지닌 행성도 아니다. 오래전 지구에서 떨어져나갔으나 지구를 벗어나지도 돌아오지도 못한 채 오직 지구만 바라보며 그 주위를 돈다. 달은 지구의 분신이다.
반면, 우리는 달의 뒷면조차 보지 못한다. 달은 공전주기와 자전주기가 같아 늘 한쪽 면만 지구로 향하고 있다. 지구에게 한 순간도 등 돌리지 않지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린 달의 반쪽만 볼 뿐이다. 어쩌면 그 달, 생애 한 번쯤 반쪽짜리 분신 때려치고 온몸 찬란히 빛내며 별로 뜨고 싶지 않을까?
<더 문>의 달은 태양의 먼지를 지구에 에너지원으로 공급하는 적막한 식민지다. 거기 한 사내가 산다. 단조롭고 지겹지만, 지구를 위해 일한다는 신념과 지구에 두고 온 사랑하는 가족의 기억으로 버텨나간다. 스스로 3년 기한으로 근무한다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그의 유통기한일 따름이다.
달에서 태어난 자, 란 설정. 조금 쓸쓸하고 로맨틱하다. 잿빛 달과 달 위의 한 인간. 절절한 외로움 묻어나는 영상 이미지는 황량하고 적막하지만 무척 아름답다.
달에서 보는 지구와 우주. 허공 깊이 매달린 모든 선은 둥글다. 곧게 가로 뻗은 수평조차 알고 보면 둥근 푸르름이다. 기댈 곳 없는 허공에선 스스로에게 기대는 둥근 곡선이 가장 안정적이니, 날카로운 모든 직선은 곡선으로 펴진다. 곧은 지평에 갇혀 있던 시선이 허공에 놓이며 비로소 멀리 있는 것들을 본다.
샘과 샘, 목공예하는 샘과 화초 가꾸는 샘. 딛고 선 지평이 허공임을 깨닫는 외로움. 외로움의 연대는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힘이 된다. 환멸幻滅이라 했으니, 불 꺼지는 순간 진실이 보인다. 한 순간 발 디뎌 본 적 없어도 기억 가득한 지구를 향해 그(들)는 귀환(!)을 감행한다. 이미 지구인도 아닌 그는 대체 누구일까?
출생 조건이 신분의 표지가 되는 세상이 아니라면, 또 출생 기원을 덮어버리고 더불어 우리라 부를 수도 없다면, 지구인 우리 앞에 나타난 그는 진정한 의미의 타인일 것이다. 정관사 벗은 달이 더 이상 지구의 소유물이 아니듯, 더 이상 거짓 기억의 숙주가 아닌 샘.
지구의 분신 The moon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외롭게 빛나는 잿빛 별, Moon에서 온 자, 그는 달의 인간이다.
정체성에 반하는 복제인간의 기억을 소재로 한 영화는 많았지만 거품 없는 이 영화, 기발하고 깔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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