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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책

다크 나이트 - 배트맨, 묵시록 속으로 커밍아웃하다.

by 숲길로 2008. 8. 15.
 

    

      

 
제목 :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2008)
출연 : 위 포스터 참고 
 

    ‘시간이 모든 것을 파괴한다.’ - 영화 <돌이킬 수 없는> 중에서


감독의 전작 <메멘토>가 워낙 빼어났기에 이후의 작품들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는데, 이번 <다크 나이트>는 열광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흥미진진한 만큼 착잡한 이 영화를 자신들의 이야기로 감정이입했을 미국인들과, 전혀 다른 관점에서 그들(의 이야기)을 바라보는 우리 사이의 정서적 거리는 너무 멀다. 몇몇 평론가들의 격찬은 좀 뜬금없다 싶고, 미국의 요란한 흥행실적이 이 나라까지 이어질 것 같지도 않아 보인다. 돌이킬 수 없는 그 시간, 9.11은 결코 세계인 모두의 동일한 체험이 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는 기시감... 특히 경찰본부와 병원 폭파 장면, 직후의 수습 장면은 전혀 낯설지 않다.)

거칠게 보면 이 영화는, 9.11 이후 깊이 상처 입은 자들의 자기 성찰이 담긴 자화상 내지 심리적 풍경화 같다. 그래서 더 흥미롭다. 영화 자체도 그렇지만 영화를 둘러싼 반응은 더더욱.


<메멘토>가 떠오른다. 쉼 없이 조각나는 기억에 의지하여 자신이 누군지를 물으며 죽은 아내의 복수를 감행하지만, 확신하면 할수록, 행동하면 할수록 진실은 더욱 모호해지더라는 얘기.  

<다크 나이트> 역시 모호한 진실에 관한, 그러나 모호하지 않은 영화다. 자기도취와 환상에 빠진 박쥐놀이의 주인공과 환호하는 관중 모두를 향해, ‘니가 누군지 알려주랴?’ 며 을러댄다. 나아가 그 환상이 불러내는 갖가지 주관적 세계상들을 치밀하게 서로 엮거나 짐짓 까발리며, 궁지에 몰린 낡고 위선적인 이분법 윤리를 잘근잘근 곱씹어 본다.

턱 괴고 나른히 바라보는 그 풍경, 태초 혹은 최후의 혼돈으로 되돌아가려는 허무의 바다에서 위태롭게 치솟으며, 불길하게 버둥거리는 문명의 얼굴이 겹쳐진다. 혼돈의 짙푸른 수평선, 잘 벼려진 윤리적 질문들과 빛과 어둠의 파편들이 물결처럼 일렁이며 반짝이다 사라진다.

 

가장 아름다운 장면의 하나.

타락천사 배트맨은 하늘 높은 곳으로부터 지상으로 엄습한다. 그가 활공하는 저 푸른 공간은 선악의 피안이자 조커가 넘보는 혼돈의 영역.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언젠가는 우주의 모든 에너지는 비가역 에너지인 열로 돌아간다. 열평형에 다다른 우주는 죽음의 세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주는 엔트로피(무질서도)를 증가시키며 그 순간을 향해 나아간다. 거역하려 용쓰며 열내면 낼수록 더욱 빠르게... 세상의 죽음은 시간문제일 뿐 피할 수 없다.

조커가 꿈꾸는 세상 또한 악으로 평등해진 세상, 혼돈 자체다. 문명인으로 계획을 세우거나 자본주의적 동시대인답게 돈을 탐하거나 현세의 권력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어릿광대 분장으로 떡칠한 얼굴, 인간의 표정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는 뇌까린다.

‘죽음의 고통을 겪었던 자는 마땅히 해괴해지는 법...’

가장 해괴한 자, 조커는 고담 시민들 모두를 해괴하게 감염시키고 싶을 뿐이다. 죽음의 게임으로 끊임없이 시민들을 유혹한다.

 

타오르는 돈더미...

황금만능의 이 시대에 돈을 경멸하는 조커는 인간의 얼굴을 버린 자다.

 

기괴한 세계.

그게 팀 버튼의 <배트맨>이었다. 그 기괴하고 낯선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며 이 세상이라고 비틀린 웃음으로 그는 이죽거렸지만, 9.11이후 미국인들에겐 어떤 악도 더 낯설지 않아 보인다.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우리 속에 있으며 어쩌면 우리 자신인 것.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 힘의 원천은 세상 자체다. 도처에 꿈틀대는 짓눌리고 감추어진 욕망과 힘들이다. 그는 다만 일깨우고 범죄적으로 활용한다. 계획하지 않는다고 그가 말할 때, 범죄조직의 보스처럼 목표하고 기획하고 지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탁월한 혼돈의 교사이고자 할 따름이다. 과연 선량한(?) 시민들이 범죄자들보다 그의 지도와 유혹에 더 쉽게 빠져든다.

적이 우리 발밑에 숨어 있었더란 게 <화성침공>에 담긴 졸렬한 깨우침이지만, 그들과 우리는 명백히 구분되었다. 그러나 여기선 그들과 우리의 구분이 없다. 실속없는 배트맨 가면이 곳곳에 출몰하듯이 조커 역시 도처에서, 우리들 가운데서 출몰한다.

누가 나를 죽일지 모른다. 대체 우리들 중의 누가 그들이란 말인가...? 목숨 걸고 함께 범행하는, 가장 믿어야 할 사이에 서로 총을 겨누며 죽고 죽이는 은행강도들을 목격한 남자는 절망스럽게, 이건 아니라고 외친다. 아마 그는 조커의 흰 얼굴을 가장 오래 기억해야 할 자일 게다. 

그러므로 이건 믿음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가장 믿었던 자에게 배신당하고, 불패의 영웅 배트맨의 저택조차 습격당한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 그게 공포다. 혼돈으로 이끄는 조커의 무기는 불신과 공포의 힘이다.

그의 유혹은 늘 단순명쾌하다. 먼저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믿음을 잃고 죽음의 공포 앞에서 공황에 빠진 자들에게 삶은 생존게임이 된다. 혼돈chaos!

악의 정체가 혼돈이라... 진부하고 단순하지만 몹시 착잡하다. 문명의 교만이 느껴진다. 그런데 혼돈의 사도, 허무주의자, 순수한 악의 화신과도 같은 조커는 타락천사 사탄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듯 나타난 자가 아니다. 그는 대체 어디서 왔으며 누가 그를 불렀는가?

그 날 이후, 세상은 그렇게도 변했던가? 그러나 그들의 그 느낌을 제대로 이해하긴 힘들기에, 이 영화는 그들만의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속편이라 해도 되겠다.

 


 

‘먼저 선을 넘은’ 자는 배트맨이다. 세계최고의 자본력과 최첨단 테크놀러지를 바탕으로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며 ‘내가 넘지 못할 선은 없다’고 외친다. 참 단순하지만 진절머리 나도록 낯익고 현실적인 캐릭터다.

그러나 선악의 경계는 끊임없이 명멸하는 가느다란 붉은 선(thin red line)이다. 그 선을 넘는다는 건, 악의 영역에 드는 게 아니라 경계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선악의 피안, 그 곳은 다름 아닌 혼돈chaos, 조커의 세계다.

조커를 불러낸 자는 배트맨 자신이었던 것이다. 선악의 경계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배트맨의 정체를 밝히고 처벌을 요구하는 시민들을 그가(아니,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조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 응수하지만, 조커는 선한 배트맨이 제거해야 할 악당이라기보다, 배트맨이 넘어버린(지워버린) 선악의 경계를 따라 스며든 혼돈 자체가 아닌가? (인간이 무모하게 뚫어버린 구멍으로 다른 세계가 흘러들어 혼돈에 빠져든다는, 영화 <미스트 the mist>가 생각난다). 시민들의 윤리적 혼란과 이기심을 초래한 건 다름 아닌 배트맨 자신의 과욕과 행동이었던 것.

그가 행동하면 할수록 상황은 더 꼬인다. 해결책이 도로 원인이 되어 더 큰 사건을 부른다. 혼란은 악순환하며 나비효과처럼 증폭한다. (긴장을 고조시키며 혼돈의 스케일을 업그레이드하는 놀란 감독의 솜씨는 뛰어나다). 조커는 과연 탁월한 혼돈의 사도이며 배트맨은 충실한 그의 조력자다. 조커는 배트맨에게 속삭인다.

‘너는 나를 완전하게 해’

 


조커가 얼굴을 드러낸 유일한 장면. 영화에선 순식간이다.

조커역의 히스 레저, 느물거리는 대사나 제스처는 짐작되지만 저 눈빛만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아마 저 눈빛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을 듯하다. 과연 최고의 유작.

 

조커가 판 함정, 배를 폭파시키라는 수인(囚人)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과정과 덴트 검사의 변신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 왜 고담시는 배트맨을 필요로 하는가? 에 대한 해답을 보여 준다.

그건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시민들 때문도, 사악한 조커나 악당 때문도 아니다. 답은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 당국. 그들이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배트맨은 합법 권력의 무능을 폭로하는 동시에 보완하고 감추어 준다. 고담시 정부의 무능이 배트맨을 낳았지만, 배트맨의 독선적이고 오만한 전횡이 조커를 부른 꼴.

그러나 조커는 너무 위험한 적이다. 배트맨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와도 같은 조커, 그는 파우스트를 유혹하는 - 혹은 불가능을 향한 파우스트의 무모한 욕망이 불러낸 - 메피스토펠레스와 같은 존재다. 폭력을 소탕하기 위해 불법적인 더 큰 폭력(의 기술)에 의지하는 것이 배트맨의 방법이었지만 조커의 기회이기도 했던 것이다.

조커에게 윤리적 문제란 없다. 모든 게 게임이다. 그가 던지는 수인의 딜레마는, 어떻게 살 거냐는 실존윤리의 문제를 누가 살아남을 거냐는 생존의 문제로 비틀어 버린다. 모든 범죄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박멸하겠다는 배트맨의 독선에 가장 신랄하고 치명적인 답변이다.

‘니가 원하는 게 이런 단순한 승부게임 아니었어?’ 라는...

 


 

조커는 운명적 짝패, 배트맨의 정체를 폭로하여 게임 오버하는 대신 그다운 방식으로 배트맨을 보호(?)한다. 또  ‘너는 절대로 악해질 수 없는 인간’ 이라며 배트맨의 치명적 본질이자 존재 이유를 깨우쳐 준다. 맹목적이고 자기기만적인 절대선의 환상이 남아있는 한 배트맨은 결코 자수하거나 사라질 수 없으며, 그런 한 조커 자신도 사라질 수 없고 둘의 숙명적 대결 또한 피할 수 없음을 말이다.


모든 것의 그림자이며 모든 운명의 아비인 혼돈, 조커는 배트맨을 부르고 유혹한다. 조커를 뒤쫓는 배트맨... 다시 하나로 엉키는 그림자...

마지막 장면, 배트맨은 달아난다. 어둠 속으로 혹은 어둠으로부터...


 얼굴들 - 가면 혹은 상처

 


회칠한 얼굴과 귀밑까지 찢어진 웃음이 조커의 표지.

그러나 저 눈빛, 꿰뚫듯 빛나지만 끊임없이 주절대는 찢어진 입에 속한 것이다. 조커가 세상에서 새롭게 더 보아야 할 건 없다. 다만 알려주고 보여줄 뿐...

'돈 따위는 필요없어, 중요한 건 메시지야'

 

 

가면은 덧씌워 가리며 다른 무언가를 가리킨다. 여기를 감추고 저기를 가리키는 가면놀이. 반면, 웃음 가득한 조커의 회칠 분장은 얼굴과 표정을 없애버린다. 드러내기와 없애기의 차이.

배트맨은 억만장자 브루스 웨인을 감춘다.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감춘다.

조커는 감추는 게 아니라 없애버린다. 이 세상에서 그는 아무도 아니다. 부정당하였으므로 마침내 스스로를 부정해버린 자다. 그러므로 억지웃음의 조커는 일종의 무표정이며 표정을 버린 얼굴이다.

박쥐는 낮과 밤의 두 표정을 모두 가진다. 고담시의 수호영웅이자 억만장자인 배트맨과, 산더미처럼 쌓인 돈조차 태워버리는 무일푼 조커. 너무 가진 자와 너무 안 가진 자.

가진 게 달라 운명도 달라진 걸까...? 상처에 삼켜진 자와 상처를 삼킨 자.

배트맨의 가면은 딱딱하게 껍질로 굳어 무기가 되어버린 상처다. 그는 시커먼 박쥐 껍질 속에 스스로를 감춘다.

빨간 웃음의 상처인 조커의 커다란 입. 그것은 깊어지고 깊어져 마침내 세계를 삼켜버린 심연이 된 상처다. 연신 혀를 날름대며 상처를 핥을 때마다 거기선 칼날이 솟아난다. 쉼 없이 쏟아지는 독설, 요설들...  

 

상처 없는 자 덴트. 그러나 가장 아끼는 것(연인 혹은 살肉)을 잃으며 악마의 투페이스로 되돌아간다. 죽음의 고통을 겪었던 자는 마땅히 해괴해져야 하기에... 해괴한 자들 배트맨과 조커 사이에서 활활 타오르는, 현재진행형의 상처는 조커를 택한다. 흉터도 껍질도 거부한 적나라한 얼굴.

살의 풍요로움을 잃어버린 얼굴의 표정은 아찔하고 섬뜩하다. 드러난 뼈가 사악의 표정이란 점에서 악은 선보다 더 깊고 근원적이다. 살은 뼈의 가면이었다. 선이란 일종의 가식, 악의 토양 위에 자라난 숲과 같다. 혼돈 위에 지어올린 무지개 궁전같은 문명... 성조기에 겹쳐지는 숭고한 허상.

 

배트맨은 살의 얼굴을 가린다. 갑옷은 뼈처럼 단단하다. 그건 뒤집어진 - 드러난 - 뼈와 같다. 뼈 안에 살을 감춘다, 갑각류처럼. 단단한 껍질 속에 부드러운 살을 감춘다는 건 일종의 위악이지만, 스스로 착각하는 영웅의 운명이란 점에선 위선이기도 하다.

조커는 가면이 아니라 분장이고 화장이다. 살의 윤곽과 빛깔을 지우는 것이다. 뼈는 윤곽을 지탱하고 살은 빛깔과 부드러운 질감을, 부피를 모두 표현한다. 인간다움의 표정은 그러한 뼈를 감춘 살로 드러나지만, 그는 인간의 표정을 분장으로 모두 지워버렸다. 피빛 웃음만 남기고.

사라진 얼굴이 가리키는 것은 그 날 이후.

 


영화에선 이장면과 비슷하지만 한결 어둡다. 여하튼 매우 상징적이다. 

 

어둠을 질주하는 배트맨과 벌건 대낮을 어정거리는 조커, 둘은 자주 엉켜 뒹군다.

단단하고 까만 두 귀 쫑긋 세우며 배트맨은 솟아나고 느물대는 조커는 자꾸 흘러내린다. 지상을 덮어버리려는 듯 흐물거리는 - 그게 혼돈의 표정일까? - 조커의 등 뒤 어둠으로부터 배트맨이 솟아난다. 부정의 제스처지만 태어남의 몸짓이기도 하다. 조커에게서 태어난 배트맨, 태어난 지 오래되었으나 이제야 그는 제 어미(혹은 아비)를 만난 거다. 조커의 복화술같은 이죽거림 속에 <스타워즈> 다스 베이더의 대사가 환청으로 들린다.      

‘내가 니 애비다(I'm your father)~~.’

배트맨이 활약하는 고담이 혼돈의 땅이라면, 조커는 고향을 찾아온 것이다. 숨겨둔 아들 배트맨이 손수 열어준 흐린 길을 따라서.

한편, 조커 자신이 말하는 조커. 그는 세상의 일상적 폭력으로부터 태어나, 죽음의 고통이 만연한 이 세계의 지평으로부터 뚜벅뚜벅 걸어 우리에게 왔다. 가족조차 핍박하고 죽이는 인간의 자식이자 남편이었다는 자. 그는 배트맨과 우리 모두를 향해 이죽거린다.

 ‘나는 너다.’

선과 악은 대립하지만 또한 동일한 기원이라는, 케케묵은 신화.


몇 대사들...


‘왜 그리 심각해?’

조커의 명대사지만, 걸핏하면 동전을 던지는 덴트 검사의 운명론 역시 조커를 준비하는 게 아닐까? 반면, 배트맨은 선택한다. 물론 과잉선택이다. 필사적으로 어둠에서 벗어나려 하는 자들이 그러하듯.

중국 5.4 운동 시절, ‘이유 없이 심각하지 맙시다.’ 란 모토가 있었다던가?

제국주의 외세와 스스로의 무기력에 짓눌린 대륙의 우울을 떨치고 일어나고 싶었던 자들의...


조커가 분장을 하는 이유는 제 얼굴을 없애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웃음의 흉터를 감추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웃음의 상처 위에 겹쳐진 웃음 분장. 더욱 그로테스크해지며 커지는 상처 혹은 웃음. 슬픔을 감춘 어릿광대의 웃음이 슬픔을 더욱 강조하듯이.

조커의 분장이 강조하는 건 무엇일까? 웃음일까 상처일까...?  

웃음은 가장 짧은 순간에 차이를 없앤다. 낙차와 거리를 없앤다. 악평등주의자답게 조커의 표지는 붉은 웃음이다. 귀밑까지 찢어진, 세상을 삼키고 싶은 혼돈의 핏빛 아가리다. 그러므로 그것은 상처이자 웃음, 돌이킬 수 없는 흉터로 굳어진 웃음이다. 입 속에 칼을 들이밀고 웃어보라며 그가 을러댄다.

‘왜 그리 심각해?’

죽음의 고통을 겪었던 자는 마땅히 해괴해지고, 가장 깊이 상처 입은 자는 더 이상 심각할 수 없다는 듯이. 혼돈 속으로 흐물거리는 어릿광대, 누가 그를 잡겠는가?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의 물결, 그 덧없는 찰나의 표정 같은 자를.

 


 

‘영웅으로 죽든가 살아남아 악당이 되든가.’

덴트 검사가 읊는 이 대사는 조커의 것이 마땅하다. 저건 말하자면, 악의 엔트로피 법칙이다. 혼돈의 시간 속에서 태어난 문명은 시간의 파괴를 거역하며 세워지지만, 어쩔 수 없이 시간의 각인을 온 몸에 새긴다. 제 손으로 상처를 꿰매는 배트맨, 늘지 않는 솜씨...

엔트로피의 물리학자 조커는 계속 주절댄다.

‘광기는 가속도와 같지...’

배트맨은 달아난다. 어둠으로부터 어둠으로.

흐린 빛의 궤적을 그리며 퍼덕이는 박쥐 날개...  배트맨의 질주가 빨라질수록 조커도 바빠지고 세계가 혼돈의 평형으로 떨어지는 속도도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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