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탕이 된 실제 이야기는 치정(癡情)이라 했다. 그러나 소영웅 활개 치는 난세에는 치정도 정치가 된다.
이 영화를 멜로로 보는 건 흥미롭다. 일종의 의도적 오독이지만 영화에 담긴 반전(反戰)의 코드는 바로 그 관점에서 더 뚜렷이 드러나고 설득력을 얻는다. <첨밀밀>의 감독 진가신의 장기는 역시 사랑이다. 멜로 코드를 무게 적절하게 끼워 넣어 우회 노선을 따르면서도 꽤 주제적이다.
가령, 그녀가 살해당하기 직전 커튼 고르는 얘기를 독백처럼 중얼거리는 대목이 있다. 전쟁과 정치라는 남자들의 일, 그 가증스런 현실을 완곡하게 부정하고 환멸하는 낮은 목소리는 무겁고 깊게 울린다.
사랑은 공감의 일종이다. 공감이란 변화의 기미조차 함께 하는 것이다. 때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일 수도 있겠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전작 <첨밀밀>에서도 그러지 않았던가 싶다. 누구였던가, 사랑하는 자들이란 비밀을 품는 자, 감추는 자들이라 했던 이는?
공감하는 자들도 곧잘 감춘다. 과거를 감추고 고통을 감춘다. 그러므로 그건 견뎌내기, 침묵하기의 문제다. 불을 안으로 삼키는 것이다. 반면 불을 뱉는 자들이 있다. 대립하는 두 남자가 각기 그러하다.
살인자는 오해한다. 그가 치정으로 자신을 배반했다고. 그러나 그 치정은 일종의 상처다. 숨기지 못한 자해의 흔적이다. 정치적 배반을 감추지 못하고 드러내는 표지다.
도원결의에 대한 현대적 패러디도 흥미롭다. 제 피 아닌 타인의 피로 맺은 의형제, 란 대목은 그들 형제애의 원죄를 이룬다. 그것은 지켜질 수 없었던 게 아니라 자기모순적인 것이다. <삼국지연의>의 도원결의는 까만 고대의 사건이거나 중국식 허풍이었던 거다.
채도를 다스리니 영상의 깊이가 보인다. 빛의 간계일 것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명암대비를 높여준 흔적이 있다. 어둠의 파편들이 뜨겁게 반짝이는 대목들이 있다.
그런데 풍경은 왜 그리 아름다울까, 폐허와 죽음의 살풍경이 그래도 되는 걸까...? 살육을 부감(俯瞰)하는 시선이지만 흔들리지조차 않는다. 삼천 명 비무장 태평천국군에 화살을 퍼붓는 장면은 <영웅>에서 이연걸이 혼자 몸으로 하늘 뒤덮는 화살을 받아내는 장면과 오버랩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역사를 훈계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로 장예모가 연출한 <영웅>의 대극에 선다. 중화주의의 느끼함을 털어내고, 멀미나는 색채 과잉을 배제하고, 목청 돋운 주장이나 유치한 설득 노력을 버렸다.
이연걸이란 배우를 별로 즐기지 않는데 그의 캐릭터와 연기가 맘에 쏙 든다. 그리고 혼자서 멜로 축을 감당하는 그 여자, 서정뢰도 퍽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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