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명 : 야연 (夜宴 The Banquet 2006)
감독 : 펑샤오강
꽃의 목을 치는 칼날이 눈부시다...
<햄릿>의 중국식 번안이라 하지만 <햄릿>과 <바자제>, 그러니까 세익스피어와 라신느의 궁중 비극을 버무려 놓은 듯하다.
물론 대작 지향의 불가피한 결과로 햄릿의 고뇌보다는, 박진하고 화려한 암투와 치정 묘사에 더 무게가 실리며 한바탕 기름지고 거한, 배우와 관객 모두의 <야연>이 되었다. 이 점, 장예모와 공리의 <황후화>에 대비되지만 탄탄한 시나리오와 균형잡힌 색채로 성취한 영상미와 이야기의 설득력은 <야연>이 한결 뛰어나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가면이다.
감추면서 드러내는 가면은 심중을 완곡하게 혹은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도구이자, 얼굴 이상의 표정을 가진 얼굴이기도 하다. 물론 우왕자의 가면 외에는 비주얼의 기교로 활용되는 면이 더 큰데, 몰입을 높여주는 면에서 나쁘지 않다.
가령, 무사들은 모두 가면 속에 있다. 그 가면은 투구이다. 그들의 병기(兵器)적 정체성을 뚜렷이 부각시키고 가공할 몸놀림의 율동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우왕자의 아름다운 가면은 분노를 봉인한 침묵과 슬픔의 흰 빛이다. 그의 가면이 감추어야 할 것은 신분과 분노이며 드러내야 할 것은 슬픔이다.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몇 대목들은 그에게, 그의 가면의 표정에 긴밀하게 연루되어 있다.
그러나 언젠가 결국 벗어야 할 가면, 거기에 사랑의 자리는 없다. 오히려 가면을 벗기는 칼날, 그게 사랑이다. 가면을 벗기는 사랑 = 죽음은 모든 배역들에 공통적이다. 헛도는 권력의 궁극적인 승리가 줄거리 밖으로 숨어버린 이 영화는 그래서 일종의 궁중 멜로다.
왕과 왕후는 가면이 없다. 마음과 표정을 감출 수 있는 자에게 가면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녀가 감추어야 할 것은 왕의 형수, 왕자의 옛 애인이란 신분이 아니다. 황후의 가면은 오히려 젊고 아름다운 몸 자체다. 독을 감춘 섬섬옥수다.
왕은 유일하게 솔직한 척하지만 또한 가장 가면의 인간일 것이다. 왕후가 자신의 여체를 가면으로 삼는다면, 그는 형수를 향한 사랑을 가면으로 삼는다. 왕의 꿈, 권력욕의 삶 전부를 위태롭게 지탱하는 사랑이라니... 군대와 칼날이라는 가면, 최고의 방패가 있음에도 그는 자신이 시해한 형왕(兄王)의 갑옷 안에 필사적으로 숨어든다.
치정과 순정으로 얽히고설킨 욕망의 권력 구도지만 규칙은 아주 단순하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지만 가장 원하는 것만은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라신느의 <바자제>에서도 왕제 바자제는 형수이자 왕후인 록산느의 사랑만 받아들이면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질 못한다.
아무것도 가질 수 없으므로, 끝까지 원할 수 없으므로 죽을 뿐이다.
햄릿이자 바자제인 우왕자, 그는 어리석은(愚) 걸까...?
펑샤오강 감독의 영화는 첨인데, 저 만만찮은 연출력이 연극적인 절제와 깊이를 좀 더 노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랬다면 물론, 무술감독 원화평이 펼쳐보인 저 현란한 눈요기는 놓치고 말았을 테지만...
사족 혹은 지네발...
정확히 말하면, 우왕자의 가면은 미색이거나 아이보리다. 쌀=생명, 혹은 상아=죽음의 말장난같은 뉘앙스...
우왕자가 햄릿이라면 오필리어의 춤은 햄릿을 위한 것이다. 오필리어의 사랑은 햄릿의 고뇌 뒤로 겹쳐지며 하나가 된다. 햄릿과 오필리어의 일치, 그녀의 사랑은 햄릿의 가면인 것.
왕자가 왕후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권력이 온다. 복수도 가능하다. 어미를 범하기. 어미에서 숙모로 다시 연인으로? 삼중의 겹쳐짐. 이 영화의 빛은 저런 겹쳐짐 - 일종의 베일 효과 - 에 크게 의존한다.
미색 천들은 하염없이 휘날린다... 투명한 것도 없고 아주 막혀버린 것도 없다. 다들 나름의 믿음(착각, 환상?) 속에서 움직인다.
춤에 대한 상으로 내린 독을 마시고 오필리어는 죽는다. 복수하는 오빠의 칼날을 막는 햄릿, 다시 사랑이다. 그리고 죽음이다. 그러나 복수의 칼날을 막았으니 배신이며 그래서 죽음이다?
우왕자는 그런데... 왕후를 좋아했을까? 죽음으로 그걸 입증한 셈인가?
록산느는 바자제를 회유한다. 사랑과 권력을 함께 쥐라고. 그런데 거절한다. 그에겐 다른 사랑이 있었다.
햄릿은 어떤가? 그 역시 거절인가? 그의 죽음은 이중적이다. 그녀를 살렸지만, 그 대목은 사랑을 암시하지만 또한 그 때문에 죽는다. 죽음은 완곡한 거절 아닌가?
절묘한 선택,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성취한다. 하긴, 달리 길이 있었겠는가...?
어떤 콤플렉스. 아비를 죽인 삼촌이 다시 아비가 되고 어미는 아비의 원수의 아내가 된다. 그 어미는 연인이기도 했다. 끝내 아비가 될 수 없었던 자, 삼촌은 죽는다. 아비란 힘든 자리다. 그러나 왕은 아비가 되지 못해 죽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얻지 못해 죽는다.
왕후는 사랑을 얻기 위해 권력을 좇는다. 사랑과 어미, 아비를 하나로 만들려던 그녀의 야심은 실패한다. 마지막 장면의 날아온 칼날은 일종의 익살에 지나지 않는다.
<야연>은 공허의 미학을 탐한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무너짐의 빛, 실패의 빛이 이 영화를 아름답게 만든다.
라신느의 희곡은‘실패하는 관계’가 아름다움을 빚어내지만, 그리고 그 필연적으로 실패하는 관계가 안으로 무너지며 쏟아내는 말들의 향연이 아름답지만,
<야연>은 실패의 제스처와 이미지들이 아름답다고 해야 할까?
반면, <명장>은 고뇌가 빛으로 휘발하는 것을 억제함으로써 아름답다. 깊이가 나온다. <야연>은 한없이 가볍고 <명장>은 깊다, 무겁다. 그녀는 그 깊이의 남성성을 짐짓 흔들어야 하는 역할이지만 너무 벅차다. 자꾸 밀려난다. 엇박자가 되면서 희비극성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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