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책

밀양(密陽) - 타인의 자리, 죽음 혹은 고통

by 숲길로 2008. 6. 21.

         

 

 

   
영화명 : 밀양 (2007)
감독 : 이창동
출연 :

 

 

또다시 장마의 심심파적.

신문에서 영화 <밀양>에 대한 어느 철학자의 삼빡한 글을 읽다가...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던 당시의 내 허접 소감이 떠올라 다시 정리.

산에 가지 못해 어지간히 심심하긴 한 모냥...

 


마지막 장면, 신애는 종찬이 들어주는 거울을 들여다본다. 제 몸의 일부인 머리카락을 자른다. 미장원에서 범인의 딸이 자르다 만 것이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가는 곳으로 햇살이 든다. 쓰레기 뒹굴고 더러운 물 고인 곳에 비치는 햇살... 사로잡혀 있던 그녀의 것들이 비로소 하나 둘 햇살 속으로 풀려난다.

용서란 자유로워짐이다. 그를 자유롭게 함으로써 내가 자유로워짐이다.


고통

내 속의 그가 아닌, 내가 대신할 수 없는 그의 고통을 망연히 바라본다. 신애의 고통을 우리가 섣불리 이해할 수 없기에 함부로 위로할 수도 없다. 다만 지켜볼 뿐이다(종찬이 아마 그러하다). 오랜 시간 후, 완강하게 닫힌 유아(唯我)의 세계를 깨고 나오며 그녀는 고통에서 벗어날 희미한 길을 찾는다.

밀양은 고통을 통해 비로소 허락된 타인의 자리다. 또한 그녀 자신의 자유와 구원의 자리이기도 하다.


타인

죽은 남편은 좋은 남편이 아니었지만 죽은 자는 더 이상 나쁘지 않다. 그럴 수가 없다. 여자는 죽은 자를 보내지 못한다. 아이의 죽음 역시 그러하다. 타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은 지속된다.

죽음이 나누는 것, 그게 타인이다. 타인은 부재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모든 자(것)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빛 속에 무덤을 둔다. 햇빛(陽) 아래 흙더미의 그늘 속에 죽은 자의 몸을 놓는다. 빛 아래이되 그 빛이 만드는 어둠/그늘 속이다. 그건 감추어진 빛(secret sunshine)이다.

밀양의 양(陽)은 타인의 자리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의 머리칼이 불려가는 곳, 떨어진 햇살 속에 아들의 시체는 누워 있었다. 죽음의 빛 아래로 보내기. 빛 속으로 그를 보냄으로써 그녀 자신도 빛 속으로 나아간다.


종교란

 ‘존재에의 갈망’(엘리아데)이다. 그녀의 존재는 자기화된 타인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없는 남편과 아들... 그녀의 자아는 그 상실을 감당하지 못한다. 고통은 유난하다.

그녀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손수 용서하려 그를 면회한다. 그러나 용서하려는 그는 이미 거기에 없다. 그녀가 발견한 건 타인의 얼굴, 혹은 바로 자신의 얼굴이었다. 자신의 관념 세계에 타인을 가두고 멋대로 용서하고 용서받으려 하는 두 사람... 무한의 거리에 놓인 그 두 얼굴은 서로에게, 역설적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타인의 얼굴이다. 그 타인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용서란 자기도취일 따름이다.      


자유

자학과 광신, 위악... 극단의 과정을 거치며 신애는, 세계가 나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많은 타인들의 것임을 깨닫고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나며 조금 자유로워진다. 타인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막막한 어둠이기도 하지만, 그 고통과 기쁨으로 나를 자유로 이끌어가는 빛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빛의 거처는 신의 왕국 하늘이 아니라 비루한 이 땅, 저 낮은 곳일 수밖에 없다.


영화 첫머리에서 종찬은, 밀양이 어떤 곳이냐는 신애의 질문에 경제 정치... 등등 나름의 인상들을 주워섬긴다. 영화의 끝머리, 똑같은 질문에 그는 답한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비슷하지요...”

이제 누구도 더 이상, 타인 없는 자신만의 세계 속에 머물 수 없다. 나의 세계는 또한 그들의 세계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