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친구에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 산의 아름다움에 대해선 서양 철학자의 그 숭고 개념은 적절치 않은 거 같다고. ‘단적인 크기’로 우리 인식능력의 가랭이를 찢는 자연미란, 부드럽고 아기자기한 이 나라 산하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 보였기 때문...
그러나 지리의 봄빛을 다시 보면서 저 생각이 조금은 바뀌는 듯하다.
산빛을 굽어보던 동행은 ‘저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며 한숨짓는다.
‘우리가 무신 예술가요? 표현은 무슨!, 자연이 표현하고 우린 그저 보고 느끼면 되지.’
웃으며 받았지만, 저 ‘표현’이 그 ‘표현’이 아니란 걸 안다. 어쩌면 그는 숭고의 느낌을 가장 분명하게 토로했던 것.
자연은 표현하지 않는다. 쉼 없이 드러나 올 따름이다. 표현은 생각하고 꿈꾸고 상상하는 인간의 일이다. 그것은 여러 겹 의식층 틈에서 솟아나는 분비물이다.
쎄레봉릉에서 굽어보는 산빛은 이른바, 형언키 어려운 것이었다. 조갯골을 물들인 절창 봄빛과 흐린 하늘로 가없이 사라지는 첩첩 산릉의 윤곽... 그 앞에서 우리 혀 짧은 언사는 물론이고 방자하게 날뛰던 상상력조차 단숨에 무너져 내린다.
자연은 상상하지도 숨기지도 않는다. 그저 무궁무진 다함이 없다.
너무 벅차 감당할 수 없는 무한의 빛을 ‘단적인 크기’로밖에 규정할 수 없음조차 어쩌면 우리 인식능력의 빈곤이 아닐까...? 싶어 크기가 아닌 깊이, 양이 아닌 질 따위로 에두르고 은폐해 본다. 그러나 그것이 물리적 크기를 뜻하는 게 아닐 바에야 막막하긴 마찬가지다. 생각과 느낌의 크기를 넘어서는 크기로 압도하는 고통스런 언어도단. 그 역설의 현장 한가운데 이미 몸은 놓여 있다.
자연 자체가 숭고한 건 아니다. 숭고는 자연을 대하는 우리 감성의 어떤 아슬한 극한이며, 스스로의 불가능에 대한 고통스러운 깨달음의 표정이다.
누가 자연미보다 예술미가 우월하다 했던가?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못하는 장엄 자연이 주는 충격, 황홀과 놀라움은 인간의 상상력이 창조해낸 가장 뛰어난 것들조차 한낱 모방일지 모른다는 낡은 생각을 일깨운다.
예술은 여전히 미메시스(모방)일까? 불멸의 걸작을 낳은 상상력이 가 닿았던 정신의 심부는 바로 저 무한, 다름 아닌 영원한 자연의 저 섬뜩하도록 무표정한 아름다움 근처가 아니었을까? 예술미란 때로 내면화된 숭고의 염(念)이 표현된 것이며, 뒤집어진 숭고가 아닐까...?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곳 역시 영원히 밝히지 못할 자연의 일종이며,
지금 이 순간, 망연히 굽어보는 저 장엄지리와 알 수 없는 침묵의 언어로 은밀하게 교통하는 어떤 빛의 거처가 아닐까...?
내 안의 빛인 동시에 자연의 빛, 그 정체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 빛이 흘러가는 곳을 따라 때로 걷고 머문다. 몸 어느 틈으로 가끔, 그 빛 한 줄기 새어나와 저 무한 자연의 아름다움 닮은 내 자연의 한 풍경쯤으로 눈앞에 환했으면 할 따름이다.
그것은 내 지극한 지리 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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