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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들...

매화마을은 없었다

by 숲길로 2008. 3. 20.
 

참으로 좋았던 곳엔 누구나 자신을 조금 내려놓고 온다. 여행은 무언가를 얻거나 가져오는 게 아니라 두고 오는 것이다. 두고 오는만큼 비워지고 가벼워진다.

끝없이 여행하는 이는 많은 걸 알거나 꽉 찬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텅 비었을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를 여기저기 풀어놓기에 그의 영혼은 가볍고 투명할 것이다. 자신의 일부가 머무는 곳을 고향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의 고향은 그가 거쳐 왔던 모든 곳이거나 바람의 길인 허공이라 해도 좋으리라.


짧은 백운산 산행 후 광양 매화마을을 들렀다. 십 수 년 전부터 매화시절이 오면 종종 들러 조금씩 나를 내려놓고 오던 곳이다. 세월이 흐르며 풍경은 변해갔지만 매화의 봄빛은 늘 고왔기에, 매화마을에 머무는 나의 옛 조각들은 다시 온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는 두고 온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 매화꽃 핀 나의 섬진마을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무는 늘고 꽃은 더 진해졌다. 인공정원처럼 변한 풍광은 더없이 기름진데, 하늘가로 떠돌던 매향도 꽃그늘 아래 고이던 적막도 없었다.

축제는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맑은 바람 불어가던 곳, 눈부시게 바라보던 심진강 기슭은 성채처럼 희게 빛나는 행사 시설물이 그로테스크하게 자리를 잡았다. 매향 가득하던 하늘은 음식 굽는 기름 냄새로 진동하고, 드넓은 산자락을 뒤덮은 꽃빛은 쩌렁쩌렁한 확성기 소음에 쩔어 있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인가... 

이번에 들른 건 삼사년 쯤만이었을까. 그 사이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시장이 풍경을 삼켜 버렸다. 이 나라 대부분의 축제란 게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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