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을 걷는 것. 어쩌면 그것은 자연이 우리를 대신해 꾸는 한편의 꿈일지 모른다. 그 꿈길로 걸어 들어간다. 대신 꾸는 꿈에 기대어 비로소 꿈꾸기 시작한다.
꿈꾼다는 건 몸을 느끼는 것이다. 꿈속에서 우린 환영들에 싸여 몸 없이 떠도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몸 없는 꿈은 없다. 꿈을 통해 비로소 몸은 자유로워진다. 가장 몸다워진다. 꿈은 자연 세계 속으로 우리 몸을 밀어넣는 순간 마찰면에서 일어나는 광채다.
광채로서의 그 꿈을 풍경이라 부른다. 풍경은 자연사물에 접한 몸의 빛나는 감수성으로부터 드러나 오는 깊은 무의미이다. 무의미에 이르도록 고양된 자연과 몸의 공명이다. 몸은 스스로를 열고 받아들이고 교감한다. 세계와 함께 찬란해진다. 풍경은 순간의 우주이다. 찰나로 부풀어 올랐다가 긴 여운을 남기며 사라진다. 사라졌다가 다시금 빛나며 되돌아온다. 그래서 거대한 회심(回心)이기도 하다.
단풍빛에 황홀해할 때 우리는 거기에 없다. 오직 황홀만이 있다. 그것이 풍경이다.
늦가을은 빛이 날카로워져가는 계절이다. 겨울의 순수한 빛, 빛의 고도(高度)는 희다. 절정의 빛은 우리를 눈멀게 한다. 물과 불, 빛이 되고 싶은 그들의 몸짓이 증기와 연기라면 그 역시 흰 빛에 다가간다. 단풍빛을 현란한 채색만으로 느낄 수는 없다. 그들도 흰 빛에 다가가려 한다. 다가서다가 슬픈 듯 어두워진다.
날개처럼 날아오르려는 잎들. (나는 자주 날개에 집착한다. 모든 곳에서 날개를 보려한다). 푸른 시절 내내 태양과 몸 섞으며 놀던 버릇으로 마침내 빛을 닮았는가, 빛이 되려는 듯 불타며 빛나지만 끝내 실패한다. 쓴 운명에 고개 떨구고 나뒹굴며 메말라간다. 단풍숲은 풍경의 시간적 본질을 드러낸다. 선순환하는 시간 구조는 이야기를 불러온다. 날개와 빛에 관한 저러한 환상들...
그러나 폐허가 역사를 완성하듯 낙엽 쌓이는 늦가을의 단편이 숲의 풍경을 완성한다. 푸르던 시절의 영광을 완성한다. 폐허는 끝이 아니라 모든 것이다. 폐허에 잠겨 뒹구는 파편들은 시절의 풍부함을 마무리한다. 숲 또한 그러하다.
단풍잎이 낙엽으로 내리면 땅을 거쳐 나무의 몸속으로 되돌아간다. 낙엽은 떨어질 때 이미 자신의 기원을 가리키며 그리 향한다. 가라앉는다는 것은 되돌아간다는 뜻이다.
풍경은 또한 몸이 빛에 간섭하는 것이다. 빛이 몸에 간섭하는 우주적 정신이자 육체라면 우리의 몸, 나무의 몸, 숲의 몸 따위는 빛에 간섭하는 움직임들이다. 살아있는 몸의 움직임은 끊임없이 빛을 부수며 약동한다. 빛 속에서 빛과 함께 빛에 맞서서, 빛을 흔들고 찢으면서...
풍경은 세계가 한낱 흔들리는 경계로 순간순간 벽을 짓고 허물어뜨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염없이 무너져 내리는 흰 스크린, 빛의 벽이면서 움직이는 허공인 풍경...
길은 꿈-풍경의 시간적 본질을 공간으로 풀어내는 곳이다. 시간에 비친 공간의 빛이다.
산길을 걸으며 몸은 꿈꾸며 완전해진다. 풍경의 길 위에서 세계는 나와 대면하고 나를 응시한다. 세계는 나를 열고 내게로 온다. 나의 시선이 아니라 세계의 시선. 우주가 그 커다란 몸 전부를 눈으로 삼아 나를 응시하는 순간, 그것이 풍경이다. 글썽이듯 환히 비추듯.
그래서 나는 눈을 감아도 되는 것이다. 세계가 이미 나를 보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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