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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들...

안개산을 걸으며...

by 숲길로 2007. 10. 5.

 

 

구름 얹힌 산을 오르는 일. 가령 그 곳이 억새 초원을 이고 있는 산일 때는 산에 드는 일보다 산을 벗어나는 일이 더 막막해진다. 구름 안개는 길을 끊으며 천지사방으로 다시 길을 펴 놓는다. 안개는 그러므로 두렵고도 놀랍다. 안개가 끊는 길을 버리고 안개가 다시 가리키는 길을 홀린 듯 따른다. 지척에서 사라졌다 나타나는 익숙하고도 낯선 이들...

안개 속에서 안과 밖의 구분은 없다. 산 아래서 들려오던 총성은 안개를 뚫고 휘날리지만 어디로 가 닿는지 알지 못한다. 총성은 안개에 갇혀 구름 능선 사방으로 메아리친다. 마침내 안개 속에 묻힌다.

공간과 시간이 뒤죽박죽으로 엉키는 안개의 시공이 지나고 나면 모든 게 다시 새로운 질서로 올 것이다. 안개구름이 걷히면 산은 새로 길을 열 것이고 새로운 길을 따라서 새로운 사람들이 올 것이다.


구름안개를 벗어나 하늘에서 땅으로 하강하는 것. 그것은 비연속적인 시간의 놀이이다. 구름은 하늘에 속하고 길은 땅에 속한다. 불연속의 공간이다. 구름 속으로 길이 들었으니 두 세계가 하나로 융합된 혼돈의 시공간이 안개산에 있다. 거기선 사라졌던 것들이 되돌아온다. 안개산은 일종의 거울이다. 두려움, 자만, 안타까움, 씁쓸한 기대와 회한 따위들까지... 그러므로 조심해야 한다. 그 중 어느 하나인들 끝까지 간다면 우리를 끝장낼 만큼 치명적이지 않겠는가.


안개를 따라가며 출렁이는 환(幻)은 가벼워지기 위한 풍선같은 공간이다. 지상에 끈을 대고 날아오르는 연(鳶)같은 것이다. 안개 속에서 나는 자신을 믿지 않는다. 가벼워질 수 있다면 대체 내가 어디에 닻을 내리고 있겠는가. 안개 속에서 내 얼굴을 더듬으면 자꾸 물이 만져진다. 얼굴을 삼키는 거울같은 안개를 보며, 벗어날 수 없는 안개늪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믿을 수 있겠는가...

 


 

아마 안개는 산이 꾸는 꿈일 것이다. 산의 꿈에 들어와 산을 본다.

고도를 높여가자 사물의 윤곽이 점차 흐려진다. 흐리게 보이던 지상의 집들이 사라진다. 보이는 건 눈앞의 흰 바위벽과 숲. 안개는 틈을 보이지 않는다.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만이 잠깐씩 안개의 옆구리를 헤집고 간다. 그럴 땐 안개산의 푸른 살이 번쩍이기도 한다.

산의 지리와 역사를 나는 즐기지 못한다. 단 한 번의 안개물결이 그 모든 것을 지워버릴 수 있다. 사람이 쓰는 모든 기록과 그가 꾸는 모든 꿈, 그가 짓는 모든 집과 도시의 풍경들을 안개산은 일거에 지워버린다. 한 줄기 바람의 붓질만으로 세상의 모든 길과 궁전들이 캄캄해진다. 가끔은 세상으로 난 긴 꼬리들이 산 높은 곳으로도 닿아 있지만 길은 닳고 닳았고 바람은 차다. 단호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시간을 기다리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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