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직립해 걸으며 인간이 되었다.
땅에서 하늘로.
직립의 의미는 하늘을 보고 꿈꿀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산줄기가 하늘 깊이 그어가는 선의 아름다움을, 바람을 움켜쥐고 벼랑에 매달린 낙락장송의 아슬한 운명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산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길을 말해야 한다. 바위틈에 못질하며 암벽 오르는 이들과 달리 - 그들은 걷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기어오른다 - 직립해서 걷는 이들에겐 산은 여전히 길이다. 머리 치켜들고 걸음을 내딛는 순간 길이다. 그 길은 숲과 바위이며 때로 눈과 물의 길이다.
모든 풍경은 길로 온다. 풍경은 한 사물이 스스로를 넘어 만드는 무엇이기도 하고 그 사물이 가리키는 또 다른 무엇이기도 하다. 풍경은 늘 사물 너머에 있다. 겹쳐짐의 결정(結晶)들이다.
스스로 빛나는 허공인 하늘은 푸른 숲의 그늘 아래 있는 것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우리 또한 그 그늘을 드나들고 있으니 하늘의 운명길 위에 있다 해도 좋으리라.
산에 오를 때마다 돌아본다. 가지 못한 산들과 지난날의 산들을. 과거는 쉼 없이 덧붙여지며 새로워진다. 가지지 않아도, 아니 가질 수 없으므로 그것은 하염없이 불어나지만 또한 조금씩 조금씩 바람결에 불려 사라진다. 사막의 모래산들처럼...
오래 산다는 것이 어쩌면 요절의 영광을 빛내는 후광일 따름이라 여겨지기도 하듯, 문득 그간 걷고 걸었던 산릉들이 찰나의 매혹과 영광에 바쳐진 미천한 봉헌의 행렬에 지나지 않음을 느낄 때가 있다. 오랜 이름들이 한 순간 바람에 흩날려 간다. 그래서 길이 이어가는 산행의 기억이란 폐허를 상속하고 거느리는 일이 아닐런지...
그러나 어떠랴. 천야일야(千夜一夜)를 이야기하듯, 같은 이야기를 매번 다르게 이야기하듯 산에서 산을 돌아본다. 도시에서 도시로 난 길이 없어 산으로 난 길을 따라 예까지 왔을지도 모를 일이니, 아직 나의 산에는 산길의 천야일야가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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