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Smultronstället, 1957
감독 잉마르 베리만
출연 빅토르 시외스트롬, 비비 안데르센, 잉그리드 툴린, 군나르 뵈른스트란드, 군나르 소버그
왠지 김기덕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떠오르던 영화.
노년.... 시간이 멈추기에 앞서 생애의 모든 시절들은 압축 버전으로 다시 한번 돌아온다. 죽음은 이미 와 있다. 구원이 뭐 별 거겠는가.
먼 길을 발목잡으며 명치의 통증을 적시는 눈부신 젊음의 빛은 노년의 영광과 고독도 함께 물들인다. 그 빛 속에서 스스로와 화해할 수 없는 자에겐 죽음조차 허락되지 못하리라.
베리만 특유의 죽음과 구원에 관한 성찰이 추억으로 더욱 빛나는 젊음의 이미지에 투영된 아름다운 영화다. 자료를 찾아보니 의외의 기사가 눈에 띈다. 이 영화는 베리만만의 것이 아니라 주연 배우의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1957년 스웨덴의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은 <산딸기>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고령의 의학박사 이삭 보르그가 50년 재직 기념으로 명예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며느리와 여행을 떠난다. 여행 도중 며느리 마리안느는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이삭 보르그는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들을 접하면서 후회에 찬 지난 시절을 회상한다. 꿈과 현실이 공존하고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가 뒤섞인 영화의 시나리오를 완성한 베리만은 곧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누가 이 고령의 이삭 보르그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베리만은 당시 배우로 활약하고 있던 빅토르 시외스트룀을 떠올렸고 제작자인 칼 앤더스 딤링이 그를 만났다. 하지만 시외스트룀은 그의 제안을 반기지 않았다. 그는 시나리오를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78세였던 그는 정력적으로 일을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제작자인 칼 앤더스 딤링은 계속 시외스트룀을 설득했다. 그는 시외스트룀에게 "당신이 하는 일은 그저 나무 밑에 앉아 산딸기를 씹어먹고, 과거를 회상하는 일입니다.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죠"라고 말했고 마침내 그의 승낙을 얻어냈다. 예상과 달리 시외스트룀은 대단한 활력으로 영화에 참여했다. 그는 베리만과 끊임없이 영화를 토론했으며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영화는 그해 완성돼 12월 26일 스웨덴에서 개봉했다. 영화가 개봉되고 3년후인 1960년 1월 3일 시외스트룀은 세상을 떠났다.
빅토르 시외스트룀은 사실 배우가 아니라 영화감독이었다. 1879년에 태어난 시외스트룀은 북유럽 전설과 민담을 바탕으로 스웨덴 영화의 독특한 미학을 만들어냈고 헐리우드 영화가 북유럽을 잠식하기 전까지 스웨덴 영화를 이끈 영화의 아버지였다. 시외스트룀에게 인간을 구원하고 인간을 순수한 영혼으로 정화할 수 있는 것은 자연이었다. 당시 프랑스 영화비평가 루이 델뤽은 그의 영화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화'라고 말했다. <잔 다르크의 수난>을 만든 칼 드레이어도 "시외스트룀의 영화 <무법자와 그의 아내>(1917)가 인간의 정신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가장 잘 묘사한 영화"라고 칭찬했다. 1923년 시외스트룀은 헐리우드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모두 9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928년 작 <바람>은 무성영화 시기를 마감하는 걸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해 오스카상을 받지 못했다. 1930년 시외스트룀은 다시 고국 스웨덴으로 돌아왔다. 그는 2편의 영화를 더 만들었지만 여생을 감독이 아니라 배우로서 살았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시외스트룀은 <산딸기>에서 완벽에 가까운 연기를 보여주었다. 베리만은 지칠 줄 모르는 영화의 원천과 만나는 걸 행복해했고 영화예술가 시외스트룀을 존경했다. 베리만은 자신의 영화에 시외스트룀이 깊은 영향력을 미쳤다고 고백했다. 15세 때 처음 시외스트룀의 영화 <유령마차>를 본 베리만은 그후 매년 여름 이 영화를 적어도 한 번씩은 봤다고 술회하고 있다. 1968년의 인터뷰에서 베리만은 <산딸기>를 만들 당시 아무도 녹음기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시외스트룀과 나눈 풍성한 대화를 들려줄 수 없는 게 후회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베리만은 <산딸기>를 오랫동안 잊고 지냈고 마찬가지로 시외스트룀이 이 영화에서 과연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말할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20년 후 베리만은 새로운 인터뷰 책(그는 1970년 이미 세 명의 비평가와 나눈 대담을 엮은 <베리만이 말하는 베리만>을 출간했었다)을 만들기 위해 <산딸기>를 다시 보았다. 영화를 보며 베리만은 시외스트룀의 얼굴과 눈, 입, 연약한 목덜미, 듬성듬성한 머리카락, 어휘를 찾는 듯 머뭇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이 왜 오랫동안 <산딸기>를 잊고 지내왔는가를 그 순간 깨달았다.
<산딸기>를 만들 당시 베리만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 베리만은 부인과의 별거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었고 부모와의 심한 말다툼과 악의에 찬 오해 때문에 가족관계가 위기에 몰려 있었다. 그는 결코 부모와 화해하지 못했다. 베리만은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의 입장이 돼 보려고 했다. 주인공 이삭 보르그는 바로 베리만 자신이었다(이삭 보르그의 이니셜 I. B는 잉마르 베리만의 그것과 일치한다). 베리만은 자신의 처지에서 도피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으며 이삭 보르그라는 인물에 매달렸다. 시외스트룀은 곤경에 처한 베리만의 아버지 역할을 대신했고 자식을 대하듯 거대한 열정으로 이 영화를 이끌었다. 시외스트룀은 베리만의 영화 안에 그가 느끼고 있던 고통, 인간 혐오증, 잔인성, 슬픔, 외로움, 냉정함, 따뜻함, 거침, 그리고 권태의 감정을 집어넣었다. 그는 <산딸기>를 자신의 영화로 만들어 버렸다. 베리만은 당시 시외스트룀이 아버지의 모습을 빌려 자신의 영혼을 차지했으며 더 나아가 자신의 영혼을 시외스트룀의 영혼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술회한다. 베리만은 나중에야 왜 자신이 이 영화를 오랫동안 망각해 왔고 이 영화에 대해 언급해야 할 순간에 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는가를 깨달았다. <산딸기>는 더 이상 베리만의 영화가 아니었다. 시외스트룀은 베리만의 영혼을 빌려 자신의 마지막 영화를 완성했던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시외스트룀이 어떻게 <바람>에서 미국의 대지에 북유럽의 바람을 몰고 왔는지, <유령마차>가 어떻게 베리만의 영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는지 눈으로 확인해볼 수 없다. 언제야 비로소 북유럽의 바람이 불어와 시외스트룀의 무덤 위에 잔뜩 덮인 모래를 쓸어내릴 수 있을까. 그때까지는 여전히 잉마르 베리만의 <산딸기>를 보며 시외스트룀의 마지막 숨결을 느껴볼 수밖에 없다. <필름 2.0> 2001.01.08
'영화,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M (0) | 2007.11.24 |
---|---|
폭력의 역사 - 기억의 복수 혹은 역사의 간계 (0) | 2007.09.16 |
한여름밤의 미소 (0) | 2007.09.02 |
디 워(D - war) - 운명의 힘 혹은 동화와 전설의 매력 (0) | 2007.09.01 |
브리치(breach) - 타인의 얼굴 (0) | 2007.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