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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책

트랜스포머 - 속도가 지배한다

by 숲길로 2007. 9. 1.

  

 

 

영화명 : 트랜스포머 (2007)

감독 : 마이클 베이

출연 :

 

 

변형(transformation)은 속도에 대한 은유다. 오늘날 속도는 생활양식이다. 또한 지배의 방식이고 모든 침투의 경로다.


그리스 신화의 변신(metamorphosIs) 역시 속도의 은유였지만 한편으로는 슬픈 실패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도망치는 자가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이 변신이었기에 그 속도는 도주의 속도인 동시에 불행과 구원(때로 별자리가 된다)의 속도였다.

이 영화의 속도는 날것 그대로 폭력의 속도이다. 그래서 공략과 침범의 속도다. 그 속도의 중심에는 헐리웃 자본이 있다. 트랜스포머의 속도는 자본의 속도이고 그들의 변형은 자본의 변형이기도 하다. 영화제국 헐리웃 자본의 변형물이 트랜스포머이며, 속도기계인 자동차이며, 사막의 나라를 유린하는 무자비한 날것(비행기계)들인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환상과 현실을 영화화하며 세계 도처에 팔아먹는다. 우리는 그들의 환상과 지배현실에 열광하고 환호한다. (좀 편협하게 말하면) 트랜스포머는 그들에겐 지배와 부의 속도지만 우리에겐 슬픈 압박의 속도이다. 디워의 영상 기술을 트랜스포머와 비교하며 열광하는 애국자(?)들이 남몰래 흘린 눈물은 아마 마를 날이 없을 것이다...

속도에 대한 통찰이 명징하도록 참신했던 영화 <큐브>가 떠오른다. <큐브> 감옥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큐브의 변형속도를 능가하는 빠르기로 소수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 영화도 ‘태초에 큐브가 있었다.’ 고 말하며 그 큐브의 속도 전략을 끌고 온다. 오토봇 보스의 심장에 박히는 큐브는 궁극의 속도,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단위 숫자 소수를 찾아 <큐브> 감옥을 해체하는 그 속도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트랜스포머의 변형은 우리의 체계/시스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다. 훨씬 더 폭력적이고 미시적이다. <큐브>는 움직이는 거대한 체제였지만 이제 그 큐브는 하나하나 살아 움직이는 ‘큐브들’로 돌아온다. 트랜스포머들 모두가 제각각 큐브인 것이다.

 

 

 

 

영화 도입부의 충격과 공포는 강렬하고 인상적이다. 갑자기 나타난 헬리콥터에는 조종사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문명의 도구 이전의 사물처럼 낯설다. 헬기는 순식간에 로봇으로 변신한다. 눈을 믿을 수 없으리만치 빼어난 이 장면은 소위 변형의 공포와 경이 그 자체다. (먹물스럽게 말하면, 동일자가 갑자기 타자가 되는 데서 생겨나는 타자 변이 공포의 전형이다). 단순미의 천재, 마이클 베이가 아니라면 누가 변신 = 엄습의 공식을 이보다 더 절묘하고 충격적으로 영상화할 수 있을까?

<트랜스포머>는 속도가 이미지, 아니 영화의 본질이란 것, 나아가 열광을 부르는 힘의 가상인 동시에 실재일 수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첨단 기술과 아이디어의 결집체로 태어난 영화답게 현대인의 몸과 존재에 대한 인식 또한 매우 예리하다.

그들 트랜스포머는 진화한 인간, 그러므로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존재이다. 그 진화의 모델들은 시대와 장소의 흔적인 기계부품들을 몸 곳곳에 지닌다. 그 진화의 흔적들에서 우리는 진화가 근본적으로 속도에 관한 열광 현상일 수 있음을 느낀다. 그들은 무엇보다 속도-생명체이다. 인간에서 기계로 진화한 게 아니라 기계에서 기계인간으로 진화한 모습이다.

친숙한 가전제품이 위협적이고 적대적인 생명체가 된다. 무엇보다 고정된 형태의 해체가 주는 공포와 놀라움. 형태에 대한 믿음은 가차 없이 배반당하고 깨져 버린다. 그것은 최초에 사막에서 출현한다. 사막은 무정형의 장소다(모래에서 태어나 모래로 돌아가는 모래인간(sandman) 얘기가 그 위로 겹쳐진다). 무정형의 트랜스포머에겐 변형이 생명이다. 냉동되어 정형으로 응고되면 죽음이다.

<트랜스포머>는 어쩌면, 존 카펜터 감독이 <더 씽 the tuing>이란 영화에서 보여준 무정형적 존재에 대한 공포의 가장 신랄하고 역설적인 진화물이다. (그래서 <트랜스포머>는 SF호러이기도 하다). 텔레파시를 구사하며 우리 몸을 빼앗는 보이지 않는 외계 생명체가 아니라, 현대인의 생필품이 된 자동차에게서 형태 없는 침입자의 공포를 느껴야 한다는 것. 기계 없이 살 수 없고 기계를 몸의 일부인 양 느끼며 사는 요즘, 무정형이란 ‘형태 없음’이 아니라 ‘모든 형태’란 설정. 매우 설득력이 있다. 발밑에서 화성인이 솟아나는 스필버그의 <화성침공>에서처럼, 그들은 다른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다. 친숙하기 그지없는 속도와 문명의 얼굴로... 

 

 

 

 

 

그러나 더 이상의 이야기는 없다. <매트릭스> 역시 속도의 가상현실이었지만 날아가는 총알과 유연한 몸놀림의 속도는 풍성한 말의 성찬과 이야기를 실어 날랐다. 트랜스포머의 속도는 가상현실과 현실을 오가는 매트릭스의 속도를 능가한다. 이야기는 궁핍해졌는데 더 이상의 속도는 없다고 우기기만 한다. 오로지 속도에는 속도만이 대적할 수 있다고 포스터 속의 오토봇과 디셉티콘은 마주보며 낄낄거린다.

 

놀라움과 허전함이 묘하게 교차하는 영화, 그것이 <트랜스포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