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still life(三峽好人) 2006년작
감독 : 지아 장커
출연 자오 타오 (셴홍) 한 산밍 (산밍)
영화는 느리고 깊고 아름답다. 영상이 탐미적인 건 아니다. 수수하고 담담하다. 지루할 정도로 말도 없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머잖아 물에 잠길 삼협의 자연 풍광,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폐허 도시의 근원경, 그 폐허를 살아있는 풍경으로 만드는 묵묵한 노동의 리듬(이 대목에서 노동의 아름다움조차 사라지는 사회주의 중국의 현실에 방점이 찍히며 리얼리즘이 된다), 어둔 불빛 아래 정물 같은 군상을 이루는 노동자들의 몸, 사물 스스로 지상을 떠나가는 초현실적 장면, 그리고 오랜 잔상으로 뇌리에 남던 마지막 장면(예술인 특유의 쟁이 냄새가 물씬한)...
<스틸 라이프>의 영상미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더 많이 불러옴으로써 아름답고 풍요롭다. 보이지 않는 시공간을 자꾸 부풀려, 사라지는 것들을 불멸의 흔적으로 저장한다. 사라지는 것들이 가 쌓이는 그 곳은 ‘행복’의 덧없는 기억들이다.
<스틸 라이프>는 중국을 그리고 있지 않다. 중국이란 시공간은 너무 방대해서 표현의 한계를 넘어간다. 감독은 불가능한 시도를 했고 그 결과 싼샤(三峽)이란 도시를 사라져가는 모든 삶의 시공간으로 보편화시켰다. 이 영화는 중국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지금 여기의 얘기다. 예술만이 다다를 수 있는 방법적 성과이자 한 편의 영화 자체보다 더 큰 결과물이다.
감독은 정물인생(still life)을 말하지만 세상은 흘러간다. 그것도 무척 파괴적인 방식으로. 그는 그 파괴의 힘에 저항하며 삶의 장면들을 응고시킨다. 눈속임의 속도가 만드는 기술(kino의 어원은 운동)인 영화는 나타남과 소멸이 그 운명이지만, 탁월한 감독들은 소멸의 현장을 영원히 사로잡으려 한다. 사라짐 = 불멸 의 등식을 통찰하고 뛰어나게 표현한다.
그와 그들의 침묵, 그녀의 갈증, 황량한 물과 땅의 나라 너머를 되돌아보던 오랜 응시들... 화면 너머 소실점을 향해 사라지며 - 어떤 건물은 파괴되는 게 아니라 사라진다 - 침묵으로 가득가득 고이는 이미지들...
싼샤의 삶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흩어졌지만 또한 영원히 남아있다. 기억과 꿈이 갖는 불멸의 힘으로, 비어 있기에 가장 가득한 부재의 방식으로.
뱀다리 :
산샤는 오래 전부터 한번쯤 여행하고 싶었던 곳이다. 이제 산샤는 없다.
영화속 산샤가 사라져가는 도시가 아니었다 해도 저만큼 아름다울까? 어쩌면 그것은 사라짐의 후광으로 빛나는 아름다움이 아닐까...?
상실을 통해, 상실을 통해서만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 사라짐의 미학은 그 가혹한 진실을 일깨운다.
- 아래는 <시네21> 지아장커 감독과 정성일 평론가의 대담의 일부 -
여기 싼샤(三峽)가 있다.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중국의 물길을 잇는 도시였다. 그 아름다운 풍경은 중국 인민폐 10위안에도 그려져 있다. 그런데 중국 정부는 여기에 세개의 댐을 세운다는 발표를 했다. 이 말은 이 도시 전체가 물속에 잠긴다는 뜻이다. 수많은 환경운동가들과 학자들의 비판이 잇따랐지만 공사는 1993년에 시작되었다. 이 공사는 세계 최대 규모가 되었다. 1750개의 마을이 물속에 가라앉았고, 이주민은 110만명이 넘었다. 그리고 이 숫자는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비판은 침묵을 강요당했고, 이 공사는 2009년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문득 주인공의 내면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초현실주의적인 장면을 끌어들이면 어떨까,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둘은 그렇게 연결된 것입니다. 그때 내가 본 것은 내면과 세상 사이를 중계하는 몸이었습니다. <삼협호인>에 이르러서 내가 개인들에게 관심을 돌리게 된 것은 나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 영화에서 (부서져가는 도시의) 풍경보다도 노동하는 사람들의 몸, 그 몸에 흐르는 땀을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사회적인 자리에서 사람을 보았다면 이제 나는 그것을 생명이라는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게 나의 가장 큰 변화입니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이런 사회는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사회에서도 살아가는 사람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통해서 인간의 존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중국에서는 질문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은 중국에서 진행되는 근대화, 자본주의화, 세계화, 그 안에서 점점 더 사람의 중요성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나는 나뿐만이 아니라 중국영화가 중국을 찍기 위해서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지금 시급합니다. <삼협호인>은 그것을 하소연하는 영화입니다.”
“......예술가들 혹은 지식인들은 사회가 자신들을 억압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엄살을 부리는 것입니다. 힘들어, 라고 말하지만 사실 현실의 무게 아래서 그걸 다 들고 서서 버텨야 하면서 진정 힘든 것은 노동자들입니다. 그들에게 현실은 험난하고, 그 현실을 떠받치고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은 엄청난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민, 그들의 힘이 이 힘겨운 세상의 현실을 떠메고 온몸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내가 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나는 이 고단함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동>을 만들면서 발견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사회를 다루면서, 사회를 잘 다루기 위해서 사회로부터 소외된 자들, 그래서 사회로부터 일정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를테면 소매치기(<소무>). 하지만 <동>을 만들면서 나는 노동자들, 중국의 인민을 보았습니다. <동>과 <삼협호인>에서 똑같은 화면, 동일한 프레임으로 리우샤오동이 있던 그 장소, 그 자세, 그 각도, 그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은 비판입니다. 그때 둘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싼샤를 보는 사람은 예술가 리우샤오동이 아니라 노동자 한산밍입니다. 세상 안에서 노동을 하는 사람이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동>과 <삼협호인>은 동시에 보아야 합니다.”
“......산 좋고 물 맑은 곳, 풍경이 좋은 곳은 사실은 살기가 힘든 곳입니다. 나는 이 아름다운 풍경이 <삼협호인>에서 내가 말하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사람들이 살기에는 너무 힘든 것입니다. 그림 같은 그곳, 그것이 여기서는 현실적입니다. 나는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받은 인상을 그대로 옮기고 싶었습니다. 만일 <삼협호인>이 이전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일종의 두루마리그림(手卷畵)처럼 찍고 싶었습니다. 두루마리는 중국화의 오랜 전통입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사라져가는 중국의 도시, 2천년에 걸친 문화가 한순간에 물에 잠겨버린 그 역사를 애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애도라는 문제가 이 영화에 다가가는 나의 감정입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싼샤라는 댐 건설의 역사에서 시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싼샤댐 건설은 2천년이나 된 이 도시를 2년 만에 물에 잠기게 만들었습니다. 2000년이라는 역사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이 급속한 발전 안에서 과거의 기억과 문화를 부수고 있습니다.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는 것은 과거를 없애버리는 과정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천안문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천안문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고, 누구도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국 정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 자체를 없애고 있습니다. 기억을 지우고, 사람들은 돌아보지 않고 있습니다. <삼협호인>은 사라져가는 기억과 싸우고 있습니다. 싼샤의 폭포와 계곡은 그곳에 가보지 않았다 할지라도 중국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중국 인민폐 10위안은 싼샤의 산수가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싼샤는 중국 돈에만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돈이 싼샤를 사라지게 만든 것입니다. 나는 기억을 불러일으켜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두루마리그림을 가져왔고, 그 느낌을 얻기 위해서 트랙을 길게 깔아서 옆으로 찍었습니다. 그런 다음 녹색의 산수화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 후반작업에서 색보정을 했습니다. 아마도 <삼협호인>에서 중국의 전통적인 그림을 떠올린 것은 청록 산수화의 느낌이 감돌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국은 도시를 찾아가면 거기에 공간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말을 빌리고 싶습니다. 안토니오니는 어떤 장소에 도착하면 일단 5분 동안 그 장소와 대화를 나눈다고 합니다. 어떤 장소에 가든지 그 공간만의 대화가 있습니다. 그곳에 가서 살아 숨쉬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느끼고 대화합니다. 나에게는 공간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똑같이 중요합니다.”
“<동>을 찍을 때 노동자의 집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있는 것이라곤 그냥 시멘트가 발라져 있는 벽뿐이었습니다. 그때 그 벽 앞에 빈 술병이 하나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 술병이 무엇이냐고 묻자 이건 내 생일을 기념해서 혼자 사다 마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예전에 그림을 그릴 때 대부분의 그림은 정물화였습니다. 그때 그림에 붙인 제목은 그림을 멈추는 그 어떤 순간이 되었습니다. 담배라는 말은 그냥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가 어떤 물질과 서로 만나서 멈출 때 어떤 기억, 어떤 흔적, 어떤 순간을 담게 됩니다. 그러니까 <삼협호인>의 영어제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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