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몸을 얻어 존재하는 것들을 말로 드러내는 건 동사나 형용사, 그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명사들이다. 그러나 스스로 온전한 쓰임을 얻지 못하는 부사들로만 모든 것을 표현해야만 하는 상황이 있다. 이 영화는 그런 단어들을 한없이 떠올리게 한다. 천천히, 느리게, 멀리, 언젠가, 거기... 한없이 표류하는 이 모든 바깥의 언어들...
느리고 먼, 안과 밖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이야기들.
브로크벡 마운틴, 단 한 철 그들이 다다랐던 그 설산 기슭은 세상의 불가능한 지평이었는지도 모른다. 긴 호흡을 한없이 삼키며 가듯 영화는 느리고 멀리 흘러간다. 그들의 표정을 가까이서 사로잡거나 비켜가도 먼 느낌은 마찬가지다.
내 안의 낯선 것을 대하는 방식. 그 낯설음이 내 안의 것만이 아님에도 바로 그 때문에 세상 전부를 타인의 것으로 살아야 하는 이들. 그들은 잃어버린 고향의 그리움을 평생을 밀고 나간다. 브로크벡 마운틴은 불가능의 장소이며 세상의 가장자리다. 울컥 낯선 것이 치솟아올라도 하염없는 눈길로 그것을 지키고 누릴 수 있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최후로 미루어진다. 피 묻은 옷, 그러니까 최초의 혈흔. 브로크벡 마운틴에 묻어야할 그의 죽음 또는 몸이란 혈흔이 새겨진 그 옷일 것이다. 그들의 고향, 그들의 존재를 얻은 곳, 그 곳은 출생지이자 소멸의 땅이다.
말하지 않는, 침묵하는 미덕이 영화를 빛나게 한다. 그녀와 딸의 관계. 이름을 갖지 못하는 관계들의 웅얼거림. 묵묵함 아니면 터질 듯한 오열로 충만한 영화...
먼 산의 침묵. 그러나 우린 산이 아니므로...
산은 다만 굽어본다. 자리와 이름을 갖지 못한 것들이 가진 존재의 권리를, 사회의 이름으로 존재의 권리를 묻고 심사하는 일의 부당함과 가혹함까지... 때로 자연의 의미는 그것일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의 권리를 가진 것임을 묵묵히 입증하는 것.
이 영화는 사랑 - 이제 우리가 그것을 사랑이라 불러 줄 수 있다면 - 이라는 이름의 불가능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 사회에서 이름을, 장소를 얻지 못해 먼 산에 묻어야만 했던 모든 불가능에 바쳐진 영화다.
대만의 이안 감독이 조금 서늘한 듯 따스했다면, 미국의 이안은 담백함은 여전해도 한결 냉정해졌다. 스콜세지 감독도 미국 현대사를 나름대로 파고들지만 기름끼를 더해가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 급급하다. 그러나 이안의 <아이스 스톰>은 냉혹했다.
담백하고 냉정한 이 영화는 멜로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불가능한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 비련 일반의 얼개를 띠지만 마초들의 세계를 관통하고 까발린다. 미국적 부와 가족의 허구와 위선을 조용하지만 실낱같은 손떨림도 없이 헤집어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는 매우 정직하다. 윤리가 곧 아름다움일 수 없지만 정직하게 드러내 보이는 실존의 풍경은 아름답다.
화면은 의외로 와이드가 아니다. 지나친 감정이입이나 자연풍광이 필요이상 아름답게 보이는 걸 배제하려 한 걸까? 그의 절제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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