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명 : 외출 (April snow 2005)
감독 : 허진호
안다는 건 일종의 상처다. 내가 나를 상처입힐 수는 없다. 타인만이 나를 찢어놓을 수 있다. 그는 불현듯 칩입한다. 피 흘리고 나타나건 고개 숙이고 나타나건 중요치 않다. 예기치도 원치도 않는 방식으로 어쨌건 뛰어든다. 온전하던 나와 내 삶을 찢어놓는다. 그래서 타인은 내게 폭력적이고 절대적 존재다. 아울러, 닫을래야 닫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나’임을 일깨워준다.
이 영화에서 그(그녀)는 그녀(그)를 상처입힌다. 상처입으며 비로소 그들은 낯설고 이질적이며 이해할 수 없는 타인과 대면한다. 가장 익숙하다고 여겼던 사람에게서, 가장 익숙한 일상 한가운데서 불쑥 그는 솟아오른다.
그러나 그들 역시 누군가에게 타인이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들은 만난다. 흘러 흘러서 만난다. 타인의 자리, 바로 그 곳에 그들 자신이 서 있다.
<외출>은 가장 흥미진진한 사랑의 한 형식인 불륜을 깊고 예리하게 통찰한다. 불륜의 본질은 ‘타인(타자)되기’이다. ‘자기 부정을 통해 알기’이다.
아내의 외출과 아내의 몸. 그는 아내의 알몸에서 긁힌 손자국을 본다. 그 때 그녀의 몸은 가장 그의 것 - 그의 세계 - 이면서 가장 낯선 존재다. 그는 말한다. ‘전에는 할 말이 있었지만 이제 없어졌다’고. 타인 앞에선 침묵해야 한다. 아내를 속이기 때문도 이해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건 타인의 얼굴, 모든 몸 가진 존재에 대한 연민 혹은 예의같은 것이다.
영화는 담백하다. 가끔 그 담백함 사이사이 살아있는 몸을 돌출시킨다.
당황한 남(여)자는 구토하고 거부한다. 몸으로 말하는 슬픔의 직설화법이다. 슬픔뿐만 아니라 모든 고통들, 말로 오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몸은 묵묵히 받아내거나 울컥 뱉아낸다.
몸은 정직하다. 그러므로 저항한다. 관습과 일상을 지탱하면서 저항하지만, 또한 몸은 가장 예민한 실존성 자체다. 가장 먼저 사랑을 향해 손은 내뻗고 서로를 더듬는다. 연민하고 위로하듯 애무한다. 그러면서 욕망의 물결로 출렁거리며 나아간다.
봄날의 눈. 두 몸이 만나는 곳에서 나와 타인, 그 존재의 이율배반을 넘어 무한 세계로 울려퍼지며 내린다. 허공을 가득 채우고 이 땅을 뒤덮는다.
영화는 느리고 깊다. 왕가위의 <화양연화>가 떠오른다. 그 영화는 이루지 못한 불륜의 사랑, 그것이 다녀갔던 시절을 탐미와 찬탄, 애끓는 갈망의 시선으로 풀어낸다. 바로 그 시절을 인생의 다시없는 아름다웠던 때라고, 보는 이로 하여금 감미롭던 고통의 그 시절들을 돌아보게 한다.
<외출>의 정서는 탐미보다 불안과 흐느낌에 더 초점을 맞춘다. 허진호는 멜로 감독이라기보다 풍경화가다. 비스듬히 물끄러미 굽어보듯 바라본다. 아주 비켜나지도 밀착하지도 못하는 시선이다. 그의 전작들도 그랬었다. 밖에서 비스듬히 들여다보는 창 속의 풍경(봄날은 간다). 여기서도 그러한 풍경화적 시선은 느리고 고요하게 흘러간다.
그러나 때로 어깨 너머 읽히던 시선이 정면을 향한다. 그 때 그들은 몸이 된다. 몸은 감추지 못한다. 그 자체가 하나의 악기인 듯 슬픔과 분노를 울려낸다. 눈빛은 흔들리며 구토가 치솟으며 어깨가 떨린다(외출이란 제목은 그러한 몸으로서의 실존이 드러내는 타자성을 뜻할 수도 있겠다).
흘러가는 삶, 그래서 닫히지 않는 제 자리. 거기에 봄날의 눈이 내린다. 그것은 둘의 다시 만남이며 최초의 그 자리이며 돌이킬 수 없는 나아감이다. 되풀이인 동시에 새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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