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명 : 이터널 선샤인 (2004)
감독 : 미셸 공드리
각본 : 찰리 카우프만
찰리 카우프만 각본답게 기발하고 아름다운 영화.
양파껍질을 아무리 벗겨보아도 껍질뿐이다. 껍질이 곧 속이니 경계는 없다. 안과 바깥의 경계에 대한 고민 없음이 이 영화의 미덕이며 빛나는 아름다움이다. 끝없이 미끄러질 따름이다.
‘...마음은 다른 얼굴, 다른 표정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지. 새로운 얼굴을 만날 때마다 거기에 옛 형상을 새기고 각 얼굴에 가장 적당한 가면을 찾게 되지.’
-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 중에서 -
무의식의 영역이 더 밝고 아름답다. 지루한 현실 너머의 기억은 한없이 빛난다. 지워진 기억 위에 다시 지어 올리는 현실은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것.
지우고 다시 시작한다는, 그 자체로 황폐하고 단조로운 현실을 반증하는 꿈의 이야기를 형식의 풍요로 밀고 나가는 솜씨가 일품이다. 이것은 일종의 유희이다. 삶은 지루한 현실이거나 망각이거나 둘 중 하나이지만 환상은 그 틈새를 열어 놓는다. 그것이 환상임을 재확인하는 방식은 유쾌하고 달콤하다. 조금은 애틋하게 머뭇거린다. 꿈의 본질이 뜬뿌리를 담그고 있는 강 혹은 바다를 넌지시 손짓한다. 반짝이는 물비늘이 영원의 햇살처럼 내리는 그 곳을...
닫힌 기억회로와 그 삭제가 뇌손상이란 대목은 흥미롭다.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풍요를 포기해야 하는 걸까? 결핍이나 부족 앞에서만 우린 새로울 수 있다? 한정된 기억의 바다를 떠돌며 그 바다를 고갈시켜야 하는 불가피한 선택. 그게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닌 바다 앞에 선다는 의미인가?
그(녀)가 없었던 기억 속으로, 즉 기억 속의 타인에게로 그(녀)를 도피시킨다는 설정. 매우 기발하다. 일반명들이 고유명을 침범하는 현상은 한편으로 빈곤한 삶의 은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세상은 고유명에 사로잡힌 일반명들로 가득 차 흘러간다.
운명과 자유는 맞물려 있다. 몇 번이고 다시 그녀를 선택해야 한다. 자유와 운명이 서로를 비트는 것이 아니라 겹쳐지면서 가능성의 세계가 열린다.
타인 속에 숨고 타인 속에 너를 숨긴다. 상투성이 기존의 맥락을 되풀이하는 것이라면, 식지 않는 사랑이란 끊임없이 기억을 다른 길로 이어나가는 것이다. 유일한 운명을 매번 다른 경로로 실현한다. 닫힌 기억회로를 벗어나 기억 속의 다른 맥락으로 달아나며 새로움을 되풀이(이 형용모순!)하는 것이다. 끝없는 사랑에겐 운명과 자유는 같은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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