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편의 옴니버스 영화 <에로스> 중에서 왕가위의 <손 the hand>
영화명 : 에로스 (Eros 2004)
감독 : 왕가위, 스티븐 소더버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이 감촉을 기억해요. 그걸로 내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 줘요.”
손은 온 몸을 대신한다. 그녀의 영혼에 대한 기억인 드레스 깊숙히 그는 손을 밀어 넣는다. 온 몸을 밀어 넣는다.
그녀는 손만 남았다. 다시 한 번 그를 만진다. 동시에 다른 한 손은 완강히 그를 막는다. 병인(病人)의 입술을 찾는 남자의 입술을 막는 손과 그를 더듬는 손, 눈물겹도록 찬란한 손의 모순이다.
손은 자유롭게 움직이는 심장이다. 혹은 성기이다. 그녀의 손의 느낌을 기억하며 그녀의 옷을 짓는다. 그녀의 몸을 재는 손과 손의 기억. 그 때 손은 감각기관인 동시에 두뇌이다. 옷을 짓는 손은 섬세하다. 손으로 기억하는 그녀의 몸을 위해 그 손으로 옷을 짓는 일. 그러므로 손은 사랑의 전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는 그녀를 위해 수많은 옷을 지었다. 그의 무수한 그녀, 단 하나이면서 또한 그 옷들의 숫자만큼인. 그 숫자는 그를 지나간 그녀의 세월이다. 그를 지나가는 바람은 오직 그녀를 향할 뿐이다.
그녀를 스쳐 지나갔던 숱한 그들을 그는 모른다. 그는 그 시간에 멈추어 있는 듯하지만 그녀의 몸과 함께 간다.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며 그 열흔에 멈추어 버린 심장의 시간이다. 그녀의 몸을 지나갔던 모든 몸들은 떠나갔지만 그 손에 닿기만 했던 그 몸만이 그녀를 지킨다.
왕가위는 시간에 관한 성찰의 대가다. 덧없는 시간, 이미지는 시간의 산물이며 공간화한 시간이다. 휘발의 순간에 모든 것은 가장 열렬히 존재한다. 존재에서 부재(不在)로 이행하는 찰나의 얼굴 혹은 표정.
클로즈업되는 빗방울, 땅에 떨어져 한 순간에 흩어지는 흰 빛의 파편. 그 빗방울은 시간의 은유이자 시간 그 자체다. 가장 아름답게 빛나던 시간 - 찰나이며 영원인 - 자체다. 왕가위의 영화들은 <아비정전>을 향해 거슬러 오르는 느린 시간을 호흡하며 푸르게 헤엄쳐 간다. 가장 아름답던 한 시절의 빛 <화양연화> 를 향해 스러져 간다. <동사서독>이 휘두르는 칼날위의 찰나들처럼,..
찰나의 본성으로 솟아오르는 시간의 덧없는 아름다움을 그는 철저하게 음미한다. 그의 이미지들은 존재증명이 아니라 부재 증명이다. 그것들은 이미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다만 기억이 있을 뿐, 기억하는 손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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