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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책

괴물

by 숲길로 2007. 9. 1.

 

  

  

영어제목  the host(2006)

 

감독 : 봉준호

출연 :

김뢰하, 박노식,  오달수

 

<괴물>에 대해 인터넷 상에서 주고받은 잡다한 이야기들...

 

(괴물의) 고통과 표정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 

- 기술적 문제도 있겠지만 감독이 일부러 애쓰지 않은 듯합니다. 꽤 고심해 설계한 듯한 괴물의 형태와 몸놀림이 이미 어떤 고통과 그 고통의 기원까지 드러내지 않습니까? 고통받는 자연의 일그러진 표정인 동시에 탐욕과 공격성의 극에 이른 우리 문명의 표정.

또 표정을 통한 교감이 가능하다면 괴물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낳았지만 소통불능. 그게 진짜 괴물본색이지요. 


몸 가진 짐승은 다 고통을 느낍니다. 전쟁/괴수영화에서 적의 고통받는 모습(인격)이 없다는, 오랜 전통을 가진 이런 비판은 정당하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선 표적이 좀 빗나간 게 아닐까요? 영화는 현실이 아니라 나름의 문법/관습에 따르는 허구지요. <괴물>은 ‘절대 박진’을 추구하여 오버액션을 관습화하고 보이는 것 밖에 못 보게 하는 헐리웃의 괴수/액션 문법(혹은 장르적인 관습)을 별로 따르고 있지 않을 뿐, 고통과 표정에 대한 나름의 독창적 표현이 강합니다. 꼭 눈알을 굴리고 찡그려야만 표정입니까? 형체가 없는 존재에 표정을 주어야 한다면 골룸의 표정으로는 감당이 안 되지요.

괴물은 자연 사물적인 무표정과 (너무도 모순적인) 지나친 역동을 동시에 지녔습니다. 결과, 자신의 기원과 출현의 시공간에 대한 함축이 고스란히 무표정한 괴물의 풍부한 표정으로 이입됩니다. <살인의 추억>에서 일렁이는 금빛 들판이나 검푸른 바람 숨죽이고 지나가던 그 숲의 표정, 또 박해일의 막막한 무표정 따위를 기억한다면 괴물 역시 그들과 한 종족임을 눈치 채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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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괴물이 대박 나서 속편이 만들어진다면 지금 새로운 혈통의 창시자가 되는 셈이다. 종족 창시자의 표정은 어떠해야 할까? 거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자신의 출생 비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의 형태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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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들을 보면, 팀 버튼의 <화성침공>에서 화성인은 조잡의 극치죠? 표정이 불가능하죠. 근데 수작입니다. 식인상어 <조스>의 경우도 돈 딸려서 조스 싯점이란 걸 만들었지요. 몸 없는 감정 표현을 시도했는데 어눌한 표정보다 더 그럴듯했거든요? 이런 영화들에 대해선 어떤 의견인지 궁금하네요. 

 

  

이야기 골격이 허술하단 주장에 대해

답이 늦었네요. 감독은 얘기 골격에 전작만큼 치중하지 않은 듯하단 거지요. 그보단 괴물에 더 신경 쓴 거 같고요. 사실 이야기 골격은 거칠죠(오히려 B급스런 배짱이 보여 맘에 들지만). 인과성, 개연성이 떨어지고 편의적인 면이 꽤 보이지요. 대신, (주관적 관점인지 모르나) 어떤 대목에선 쿠스트리차, 테리 길리엄, 또 어디였던지 가물거리는 우화나 SF적 환타지의 유혹도 보이는 듯했거든요. 감독 입장에선 전작과 또다른 표현방식의 유혹/욕심을 느끼는 건 당연할 거고요. 

흥행, 1000만은 가뿐 넘겠지요. 연령층이 고루 분포된다는 소문이니... 바람 탄 거죠 뭐. 지나치지 않고 친절하고 기본은 되어 있는데다 강력 마케팅에, 경쟁자 없는 시즌... 솔직히 흥행은 답할 능력도 별 관심도 없지만, 넘 많이 걸려 다른 거 볼 게 없어 왕짜증입니다.


반미 코드에 대해

우습게 반미가 부각되어 광고효과를 내는 것도 그렇습니다. 미국은 그저 하나의 소재일 뿐,  반미보다 권력이란 코드가 더 강하던데요. 그래서 풍자 강한 블랙코미디 계보 영화인데 현실과 영화를 구분 못하고 넘 진지하게 보는 듯. 월드컵은 그저 스포츠인데 국가간의 전쟁이나 되는 듯 열광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지요. 그런 태도가 무엇보다 이 영화가 은연 조롱하는 권력적 태도거든요. 결국 영화가 비판하는 짓을 영화 보며 다시 저지르는 꼴...

 

 

전체적으로 ...

 ‘철저하게 괴물의 감정을 배제했을지도 모른다는’ 는 주장에 동감.

애초 제가 자연사물에 무슨 표정이냐 했지요? <살인의 추억>도 그랬지만 봉감독은 무생물 소재로부터 정서를 환기하는데 특출한 재능을 보입니다.

현서와의 대결 장면에서 감도는 적대적 교감의 팽팽한 긴장. 다른 영화들이라면 통상 살기나 긴장된 시선, 근육운동 따위로 드러낼 텐데 그러지 않더군요. 그게 작품성을 높였다고 봅니다. 훨 깊은 감정을 가진 몸의 표정, 화면 구도 전체를 통한 표정 효과가 생겨났습니다. 심연같은 허공과 침묵의 표정이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괴물은 한결 거대해지며 권력(영화의 중심 코드인)적이 되는데 반해, 현서는 그 권력의 심연으로 추락하는 듯 창백하고 공허한 표정을 짓습니다(현서의 연기와 장면구도를 통해 괴물에게 감정표현을 주는 좋은 예입니다). 신파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게 절망의 감정이입을 기막히게 끌어냅니다. 영화의 진정한 클라이막스지요. 이런 게 한 수 위의 미학적 성과 아닐까요?

또 영화 초입부에 한강공원을 유린하는 괴물의 난동 풍경. 무심한 듯 굽어보며 훑어가는 장면인데 대단히 아름답습니다. 이 수채화적인 공포, 절제된 감정 표현이 오히려 괴물을 소품이 아닌 진정한 주연으로 만들지 않나요?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가 채택한 괴물의 감정표현 방식은 안면 근육운동 같은 게 아니라 몸 전체와 주변 환경, 상대 캐릭터와의 관계, 무엇보다 솜씨 좋은 장면구도를 통한 간접화법이란 거지요. 결과는 저비용으로 꽤 고급스런 이미지의 획득인 거 같네요. 괴물 캐릭터의 성공은 CG 기술보다 봉감독의 재능 덕이라 봅니다.

 

 

 

덧붙여 강두네나 누구도 왜 괴물의 정체를 따지지 않는냐는 질문.

이는 전형적으로 장르적 관습에 따른 질문이네요. 영화는 현실이 아니고, 특히 이 영화는 현실의 충실한 재현과 거리가 멉니다. (누구나 그럴건데... 식의) 현실적 필연의 요구가 설 자리가 별로 없지요. 그 잣대로는 너무 엉성하고 말 도 안 되는 게 이 영화입니다. 광고에 ‘장르 비틀기’란 말이 있지 않았나요? 이 영화는 바로 그 정체를 묻는 질문의 자리에 일련의, 혹은 뜬금없는 해프닝과 난장판(잔치판?), 어이없는 사적 전투를 펼쳐 놓습니다. 끝에 가면 그 질문은 우문이 되거나 버려집니다. 제 생각으로는 <괴물>은 에밀 쿠스트리차적 판타지 - 괴수 판타지나 가족 드라마가 아니라 - 와 테리 길러엄식의 블랙코미디 계보에 닿는 거 같습니다. 평론가들의 압도적 호평도 그런 우화/판타지적 요소 탓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더욱 반미니 어쩌니 하는 주장도 별 쓸모없어 보입니다.

 

 

 

 

 '정체를 따지지 않는 게 장르 비틀기'가 아니라 정체를 묻고 추궁하며 부딪치고 해결/좌절해가는 그런 기존의 장르를 의도하지 않았단 거지요. 물론 괴물은, 문득 대면한 섬뜩한 우리 일상 자체였기 때문에 불가능한 질문이라 답할 수도 있겠지요. 어쨌거나 영화 전체로 볼 때는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한 질문이란 겁니다.

이 영화는 자체로 한바탕 헛소동 아닙니까? 숙주(host)란 제목도 충분히 은유/풍자적이고요. 정체불명의 괴물과 거기 기생하는 수많은 텅빈 권력들의 가당찮은 이해관계가 한바탕 생쇼 아닙니까?

강두네의 전투, 그거 웃기잖아요? 공권력이 할 일을 소시민들이 생똥을 싸며 지랄떤다 말입니다. 요즘 세상의 우리네 살림이라는 게 뚝 잘라 던져 놓고 보니 지랄도 그런 지랄이 없더란 거 아닙니까? 그런 영화에 괴물의 정체를 묻는 게 오히려 얼마나 비현실적인가요?

 

 

살인의 추억에 대해선 동감.

그러나 <괴물>은 <추억>과 장르가 좀 다르지요. 더 영화적(판타지)이라고 할까요. <괴물>은 <추억>과 달리 이야기 짜임새가 치밀하지 않지요. 그렇다고 괴물을 포함 캐릭터 역시 비현실적이냐 하면 그렇진 않네요. 뚜렷한 캐릭터에 선 굵게 현실을 담는 게 봉감독 특기이자 상업적 성공의 한 요소 아닙니까? 그러나 전작의 캐릭터보다 약하긴 해요. 상황을 수용하며 드러내는 역할과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역할이 좀 조잡하게 맞물리지요.

거칠게 보아, 전체 틀이나 이야기 전개는 풍자 강한 우화(특히 송강호 수난 축), 주연급들은 제법 사실적(괴물과 가족들 역할과 입지), 조연들과 인물 환경은 역시 우화풍(특히 제복 캐릭터들). 이 조합은 비교적 무난하나 빼어나 보이진 않습니다. 드라마 중심의 감정이입에 익숙한 분들은 꽤 헛점을 보셨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감정이입을 배제하며) 이미지 중심으로 보는 편이라 친숙한 일상들이 섬뜩하도록 낯설어지는 맛이나 까실한 주제의식이 도드라지는 한바탕 헛소동이 좋았습니다. 또 괴물의 감정보다 괴물의 이미지에 매료되었고요.

결국 확인된 건 영화보기 관점의 차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컬트적 장면들 얘기 하시니... 한 마디.

초입의 비 내리는 한강 이미지, <블레이드 러너> 한 장면을 연상시키면서도 만만찮은 빛깔의 성찬을 예고하더군요. 과연 다양한 푸른 빛들과 흰 빛, 황갈색 벌판 등의 대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또 초반 지하철 시점. 초원의 사자 비유는 좋군요. 굽어보는 안전한 거리에서 뒤뚱거리는 괴물을 바라보는 그 기막히도록 무심한 풍경은 수채화적 브뤼겔이랄까...

갇혔던 강두가 탈출하여 벌판을 휘젓는 장면은 쿠스트리차의 난장판 한마당이 떠오르는데, 부감 샷으로 좀 더 길게 잡았어도 좋았을텐데 싶더군요.


- 급적사랑..이란게 뭔가요? 

- 아마 가난해 보이긴 강두가 매점을 운영하기때문에 세주보다는 부유계층으로 보여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강두-세주는 아버지-아들 관계이지만, 부유계층-빈곤계층이다 라는 해석....인것 같습니다. (연대에 의한...이란 뜻은 세주가 전혀 모르는 -순수 입양-관계가 아닌 현서에 의해 알게된, 현서가 아끼는 의 뜻을 의미하는 것일 테구요)  eufamily  2006.08.10 오전 09:45 

- 잘 읽었습니다. 정말 그러네요. 많이 공감합니다. 아쉽게도 남주 이야기는 철저히 배제되어있네요. (단지 발란스만 맞춘다고 하기는 좀 무리죠. 다른 가족들과 똑같은 역할을 분담하니까요.) 그리고 현서는 돌아오지 못하고 아이만 보낸다고 하였으나, 시간이 경과된 마지막 장면에서 현서의 죽음은 모호하게 처리되고 (죽었다는 단서는 어디에도...) 역으로 현서(여성-어머니 이미지로 떠오르는 것에 동의합니다, 특히 아이를 품고 나오는 장면)가 아니면 해체된 가족은 봉합되어질 수 없었겠죠. 그런 면에서 저는 김기덕이나 박찬욱과는 다른 봉준호의 여성성을 보게 됩니다.

 

 

 <괴물>에서 느끼는 여성성에 대하여

 답변이 늦었습니다. 남주는 여자이긴 한데 여성적이질 않지요. 성 역할의 고정관념을 비켜난 지점일 수도 있겠는데, 더 이상 여성=모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그렇다고 과잉 남성성=야만을 극복하는 대안은 되지 못하는 듯. 폭력적 상황을 폭력적으로 해결할 뿐이지요. 또 독을 먹은 한강은 괴물을 낳는데 이 넘은 아주 인상적인 방식으로 아가리로 현서와 세주를 뱉습니다. 이 넘 성별도 물어야 할까요...?       

'계급적 사랑과 연대'란... 머, 그들이 같은 도시빈민 계급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한 거지요. 서로에게 총질하고 훔치던 관계를 넘어 먹이를 나누는 가족이 되었고 더 이상 어머니/여성을 찾지 않을만큼 성숙했다는 것. 강두는 현서를 찾고 잃는 과정(괴물과 변증법적 관계를 거쳐)을 통해 자기정체성을 확립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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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에는 성적 코드가 전혀 없으며 가족이 생물학적 불모성으로 설정된 점이 인상적이다.

영화 중반쯤에 참회하는 (무능했던) 가부장이 패배해 사라지고, 납치된 현서는 어머니 이미지로 떠오른다. 그래서 남은 가족들의 현서 찾기는 결핍된 어머니 찾기의 고단한 여정으로 비치기도 한다. 이런 대목들에서 봉준호 감독의 냉소와 은유는 빛을 발한다.

<살인의 추억>에서 그는 근육질의 산업시설들을 배경으로 과잉남성들의 희화적 행태, 유린되는 익명의 여성들, 그리고 박해일의 모호한 중성적 이미지를 절묘하게 대비하며 우리 사회의 불모성과 황폐를 날카롭게 풍자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와 현장으로부터 어머니/여성 이미지를 아예 포기해 버리려는 듯하다(현서는 돌아오지 못하고 아이만 보낸다). 죽음을 마시고 괴물을 낳는 한강은 더 이상 젖줄이 아니다. 균형 있는 여성성의 회복을 요구하지도 않기에 한국 현대의 기괴하고 불구적인 남성성에 대한 비전을 끝까지 밀고 간다.

아름답지만 검푸른 무기질의 강, 강물빛 금속성으로 번들거리는 괴물의 몸, 콘크리트 구조물의 벽으로 둘러싸인 어둠의 거처. 현대의 신전인 양 미래파적으로 아름다운 한강 교각들. 그 너머 복면하듯 희게 분장하고 숨 막히는 위생공간이 되어가는 도시. 공허한 권력놀음으로 허둥대는 허깨비같은 무리들... 그 어디에도 여성성은 고사하고 성/생명 자체도 불가능해 보인다. 또 다른 의미에서 은근히 김기덕이나 박찬욱보다 암울하다.

다만, 결말부에 가서 재구성되는 가족이 있다. 성별과 혈연의 자리를 대신한, 다분히 계급계층적 사랑과 연대에 의한 가족인데, 보기에 따라 상당히 급진적인 대목이다.


흰 눈은 하염없이 내리지만 여전히 건조한 변경일 뿐, 세상의 중심은 어둡고 너무 멀리 있다. 영화를 보며 문득 장선우 감독의 노골적인 터프함이 봉준호 감독의 세련된 과격함(?) 위에 겹쳐진다... 

 

 

먹는 이미지들

(캔맥주를) 괴물에게 던지고 받아먹고, 강두와 현서가 나눠 마시고. 현서가 캔을 걷어차면 거품을 뿜고. 현서가 세주에게 맥주를 마시고 싶다 말하고(아빠를 생각). 괴물이 캔을 토해내고(강두가 던진 것일 터). 다시 현서가 괴물에게 캔을 던지고(강두의 행위 반복).

희봉이 자식들에게 강두가 어린 시절 제대로 먹지 못해 그리되었다고, 구박하면 안 된다고 훈계. 강두가 금식지시를 어기고 골뱅이(괴물과 유사형태)를 먹고. 현서를 찾아나선 가족들이 매점에 모여 컵라면을 먹고(현서가 슬그머니 끼어들어 김밥을), 먹음을 통해 하나 되기.

세주 형제가 목숨을 걸고 매점을 털러가며 먹고 사는 일의 고단함을 말하며 돈은 털지 않고. 강두가 세주를 깨워 밥을 먹고.

한강이 독을 먹고 괴물을 낳고. 괴물이 사람을 잡아먹었고 뼈를 뱉어내고(강두의 캔도 뱉고). 빗물을 받아 마시고, 휘발유도 받아 마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