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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책

갱스 오브 뉴욕 - 거리에 관한 지루한...

by 숲길로 2007. 9. 1.

 

 

영화명 : 갱스 오브 뉴욕 (2002)
감독 : 마틴 스콜세지

출연 :

 

광고문구가 다 말한다. “미국은 거리에서 태어났다”

어떻게? ‘머리에서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 쓴 채...’

 

줄거리와 내용은 단순하다. 19세기 중반 뉴욕, 감자기근으로 밀려든 아일랜드 이민들과 토박이들의 갈등을 복수의 개인사로 굴절시킨 미국근대의 전사(前史)다. 남북전쟁이 근대를 향한 미국사의 한 벅찬 길목이라면, 이 영화는 폭력의 프리즘으로 그 직전의 역사를 분광한다.

폭력의 시공간. 그들은 그걸 거리라 부른다. 만능의 영상기술을 뿌리치고 수공업적으로 꼼꼼하게 짜낸 장대한 폭력 공간은 영락없는 브뤼겔의 풍속화다. 부감으로 조망하는 눈밭의 전투. 거리는 사각의 화면을 넘어 무한히 확대한다. 도처로 분산되는 피의 무게중심. 놀랍게도 유화적 평면은 깊이를 얻는다. 지독한 피비린내도 아랑곳없이, 화면 구석구석 빈틈없이 균형 잡힌 세부묘사로 전체를 끌고가는 능청스런 힘.

비현실의 미로처럼 엉킨 주거 공간은 또 어떤가. 정물의 표정에 심오함을 부여하는 빛과 어둠의 은유는 예나 지금이나 설득력 있는 표절이다. 스콜세지 감독은 최고의 풍속화가로 손색이 없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처음이자 끝이다.

 

   

피가 없는 거리 이야기는 거짓이다. 전사(前史)와 근대가 만나는 곳도 거리다. 폭력은 거리에서 세대교체한다. 역사의 전환은 정점에 이른 폭력의 순간을 뜻한다. 그러므로 근대는 또한 폭력의 근대화였다. 파이브 포인츠의 그들이 만난 근대의 얼굴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것, 보다 강한 힘일 뿐이었다. 징병 폭동 장면은 단연 빛난다. 휩쓸어 가는 순수한 운동으로 고양된, 엄습하는 폭력은 박진하다. 전쟁이라는 낯선 힘은 구태의연한 힘들을 휩쓸어 버린다.

그러나 폭력의 얼굴은 똑같다. 근대화된 폭력 앞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마주선 두 사람. 역사의 가장 희화적인 한 장면이다. 그들은 더 이상 낯설지 않으며 더 이상 적이 아니다. 다만 처음으로, 그들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고자 할 뿐이다. ‘고대의 병법에 따라’ 그는 복수한다. 복수가 성공하는 곳에서 역사의 간계도 함께 이루어진다. ‘미국인으로 죽어가는’ 도살자 빌은 이미 암스테르담의 아버지와 다르지 않다. 유치찬란한 이 대목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따뜻하다. 당황스럽다. 

폭력은 되풀이된다. 그게 그 나라의 역사이기에 말이다. 역사는 덧씌어진다. 근대란 없다. 국가란 보다 강한 힘일 뿐이다. 이게 제국주의 미국을 살아가는 정서의 하나일까? (영원할 것만 같았던 로마제국 시절, 유혈 낭자한 검투의 도취와 스토아적 숙명론은 둘이 아니었다)      

마지막 부분, 함대 포격으로 폐허가 된 뉴욕에 이어 9.11테러 이전의 뉴욕이 보인다. 의연한 쌍둥이 빌딩은 아직 부서질 게 남았지 않느냐고 이죽거린다. 폭력으로 건설된 땅에 파괴될 것들이란 늘 있지 않겠느냐고. 보이지 않고 남겨진 마지막 장면은 9.11을 기억하는 우리 상상력으로 완성된다. 


감독의 전작으로 <순수의 시대>란 영화가 있다. 난 그 제목을 종종 ‘아름다운 시절(belle epoche)’로 착각한다. 제국주의로 이행하기 직전 돌아오지 않을 마지막 호황에 잠겨있던 19세기말, 세기말적 탐미와 퇴폐로 침몰해가던 한 시대의 풍경을 ‘아름다운 시절’로 회상하는 부르주아적 위선의 역설이 돋보이던 수작이었다. 거기도 ‘거리’는 있었다. 거리는 떠도는 은유였다. 가문과 신분, 지위의 규칙은 추상화된 거리였다. 말과 눈짓, 행동들의 암시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떠도는 은밀하며 노골적인 폭력이었다.

거리란 어디에나 열리는 폭력의 장소, 폭력으로 씌어지는 시간의 놀이터다. 그것은 공간화된 시간, 그러므로 역사는 거리에서 이루어진다. 

 

 


황홀이라 해도 될까? 다니엘 데이 루이스!

캐릭터의 힘일까? 도살광 빌을 숭고하게 하는 건 공포의 후광 속에 잠긴 천재적인 폭력의 고뇌 아닌가. 고뇌하는 폭력? 그건 환상이다. 사실은 자기도취의 나락으로 곧잘 굴러떨어지는 심오한 단순함, 파시스트나 덜 떨어진 치들 - 부시와 그 무리들을 보라 - 이 좋아하는, 상투적으로 숭고(?)해지는 악일 뿐이다.

진짜 대단한 건 그의 연기다.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에서 보여주던 매혹적인 눈빛을 기억한다면, 그의 신들린 연기만으로도 이 영화는 제값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