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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책

콜드 마운틴 - 태극기 휘날리지 않는 그들의 전쟁

by 숲길로 2007. 9. 1.

 

 

영화명 : 콜드 마운틴 (2003)
감독 : 안소니 밍겔라

출연 :

 

 별 기대 없이 영상이 탐나서 극장에서 보고 싶었는데 의외로 좋았던 영화다. 

현란한 역동과 전율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며 감각적 박진만을 찾는 과잉의 미학이 아니라, 느리고 깊은 호흡으로 단순한 줄거리 속에 차분하게 쌓여가는 디테일들을 마침내 보편적 주제로 녹여가는 솜씨는 일품이었다.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저력이 엿보였고, 며칠 전에 본 <태극기...>와도 여러 모로 비교되었다. 전쟁영화라 하기 힘든 이 영화를 <태극기>와 비교하는 건 무리지만 며칠 사이에 본 두 영화라, 전쟁을 다루고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가 줄곧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전투 장면부터가 달랐다. 미국 남북전쟁과 6.25의 시대차에 따른 전투양상의 차이도 있겠지만, <마운틴>의 카메라는 전투에 뛰어들어 함께 흔들리지 않는다.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 덕분에 <태극기>나 헐리웃 블록버스터 전쟁물이 요구하는 감각의 강제적인 과잉 소모가 없다. 취향 나름이고 서로 장단이 있겠지만, 관객을 전투 현장에 억지로 처박아 넣지 않고 일정 거리에서 바라보게 함으로써, 전쟁이 단지 물질화한 이미지로서의 전투가 아니라 극단적인 삶의 한 모습임을, 또 전쟁이 전투 자체를 넘어 여러 맥락으로 자연스레 연결되고 보다 큰 외연을 갖는 어떤 현상임을 느끼게 한다.

가장 인상적인 건 구체적인 표정을 갖고 ‘보다 큰 어떤 것’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자연이었다. 이 점은 테렌스 멜릭 감독의 걸작 전쟁영화 <씬 레드 라인>을 연상시킨다. 물론 그 자연이 전쟁이라는 인간세계에 다가오고 참여하는 방식은 연출가의 의도와 주제의식의 차이에 따라 다르긴 하다.

밍겔라 감독의 자연은 전체 흐름에서 보면 후경으로 등장하여 서서히 떠오르며 변해 가고 또 변하게 한다. 그것이 가장 능동적인 상황은 오히려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침묵할 때이다. 멜릭 감독에서와 달리 자연은 전투 현장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연인 또는 고향 등으로 구체적인 인물이나 의인화된 이미지로 나타나다가 대지로 확대되고, 마침내 강인한 모성성까지 합쳐져 더욱 장해진다. 자칫 눅눅해지려는 멜로의 요소를 서늘히 말려 갈무리한다.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도 그 비슷했거나 조금 더 말랑했던 거 같다. 물론 <아웃 오브 아프리카>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연상시키는 상투적인 면도 없지 않다. 새로움의 부족이 이 영화를 평범하게 만든다. 그러나 어쨌건 그런 점이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골격으로 하면서도 멜로나 신파로 떨어지지 않고, 가파르게 굴곡지는 인간사를 보편적이고도 영원한 아름다움의 한 장으로 끌어올리는 든든한 힘이 아닐까?

 

 

 

 


<태극기>의 경우, 강제규 감독은 ‘전투가 아니라 전쟁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는 가족 또는 형제애를 통해 그것을 이루려 하지만, 그의 형제애가 보편적인 것이 되기엔 초점이 맞지 않다. <태극기>에 보편은 없다. ‘한국적 특수’만 눈부시게 강렬하다. 결국에는 ‘우리는 우리다’ 고 외칠 뿐이다.

장동건의 입지는 ‘나는 죽지만 너는 살아라’ 가 아니다. 오히려 과잉된, 그러나 불가능한 아버지다. ‘부모의 희생 위에 훌륭하게 성취하는 자식’이란 낯설지 않은 도식. 불가능한 과잉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광기다(그래서 장동건의 연기는 백십퍼센트 성공이다). 그 광기의 빛 혹은 어둠에 갇힌 자들. 어느 누구도 희생해야 할 자와 그 희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할 빚진 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 또는 우리의 형제애는 단지 우리의 것일 뿐이다. 그 ‘우리’에 타인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보편적인 것은 사랑이나 희생이 아니라 부채의식이다. <태극기>는 보편적인 부채의식에 시달리는, 성찰 없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분단 또는 반공 이념의 현재적 변주를 거슬러 탐문한다. 이 영화는 마침내 찾은 그 주제에 바치는 비장한 헌사다. 그래서 <태극기>는 몹시 불편한 이데올로기 영화로 느껴진다. 

또 <태극기>는 이상한 의미의 리얼리즘이다. 현재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이상하다면 이상한 현상들. 과잉 교육열과 가족 이기주의,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기꺼이 망가지려는 적극적 타락 욕구 등등의 심리적, 사회문화적 기원의 하나가 6.25 체험일 수 있음을 정확히 포착해 드러낸다. 그 점에서 강제규 감독의 안목은 역설적으로 탁월하다. 장동건의 캐릭터는 오늘의 한국사회에 대한 원형적 반면교사다.

 

 


사랑이나 희생은 결코 부채가 아니라 그 자체로 매혹이며 가장 강렬한 삶의 한 방식이기에 고스란히 그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한다. <마운틴>에서, 말로 드러나는 사랑이 아니라 침묵이 은유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를 부른다. 남자는 사랑의 부름에 응답하여 돌아간다. 서로에게 아무 책임도 없다. 부름과 응답의 험난한 과정에서 어느 누가 죽었다 한들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랑이나 희생은 자신 혹은 타인에게 지우는 무게나 부채가 아니다. 삶의 순수한 열정이고, 굳이 무게라 한다면 존재의 무게일 것이다. 그것은 전쟁을 초월하기에 가장 전쟁에서 멀리 있고(공간적으로가 아니라) 또 대립하는 것이다. 사랑이 부채가 될 때 그것은 희생도 아니다. 교환이고 거래다. 동생을 향한 장동건의 사랑에는 어쩔 수 없이 정치와 경제가 보인다. 가족이란 이름의 정치와 경제. 그의 배반은 잃은 자가 아닌 패배자의 복수하고 싶은 선택이 된다.       


* 웃기지도 않는 ; <마운틴>은 여성의 시선이 강한 영화고 <실미도>나 <태극기>는 전형적인 남성의 시선인데, 도무지 남자들 눈은 왜 자꾸 오버하며 눈물을 탐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