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명 : 돌이킬 수 없는 (2002)
감독 : 가스파 노에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고?
생뚱맞다. 인간이 스스로 파괴한다. 파괴함으로써 파괴된다. 이건 폭력에 관한 영화다. 그러면서 파괴의 쾌락을 추억하는 게 인간이라고 말한다. 지독하게스리...
끝없이 이어지던 그녀의 비명,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는 붉은 빛들. 속을 뒤집어 놓는 직설화법 속에 숨은 계산된 이미지들... 빌어먹을 혼돈의 지옥도 한편을 풀어놓고 능청스레 그 발생의 기원을 더듬어가는 ‘가스파 노에’란 감독. 지독한 녀석이다. 게다가 전작은 근친상간에 관한 영화라던가?
시간을 거꾸로 풀어 가는 방식은 설득력이 있다. 미래를 기억하는 이들의 눈에 비치는 저 덧없이 위태로운 평화, 그리고 꿈. 발생의 원점을 향한 회귀의 기록이란 점에서 이창동의 <박하사탕>을 닮았다. <박하사탕>에서 설경구는 미래의 기억 속으로 투신해 버리지만, <돌이킬 수 없는>의 모니카 벨루치는 감히 미래를 꿈꾸지 말라고 절규한다. 그러나 다행히 시간은 기억의 부정이기도 하기에, 위태로운 하루를 건너온 우리는 오늘도 편한 잠을 누린다.
인간은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존재인가? 그 심연에 비하면 불타는 바그다드가 오히려 단순해 보인다. 피에 주린 자본의 욕망이 보여주는 제국의 악마적 얼굴, 전쟁이라는 절대 폭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극단의 공포들. (물론 그것조차 전쟁의 실제가 아닌 조작 편집되고 추상화된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제국의 얼굴, 자본의 표정은 인간의 그것이 아니라고 무력하나마 자위할 수 있다. 우린 그 자본의 고삐를 틀어쥘 수 있는 인간이라고 최소한의 다짐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인간에 대한 기대를 여지없이 짓뭉개 버린다. 오히려 우리 자신 내부로부터의 어떤 섬뜩한 낯설음과 대면케 한다.
뒤죽박죽의 자막에 이어지는 금관악기의 기분 나쁜 음향은 베리즈모(verism) 오페라를 연상시키며 박진한 비극을 예고한다. 인간의 두 얼굴을 상징하는 듯한 도입부의 사내들. 벌거벗은 자가 노골적 욕망 - 금기시된 폭력이며 징벌의 대상이다 - 이라면, 옷 입은 친구는 은밀한 욕망을 암시한다. 옷은 벌거벗은 위반의 충동과 폭력을 은폐하는 위선의 도구다. 그들이 나누는 대사는 당혹스럽다. 근친상간을 회상하는 벌거벗은 친구에게 옷 입은 목소리가 대꾸한다. ‘그래도 그 쾌락의 기억까지 잊을 필요가 있느냐’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현실이 어디까지인지 묻는 듯하다.
단지 욕망? 그게 아니다. 금기를 넘어서는 위반의 핏빛 전율. 그건 죽음의 언저리이며 그림자다. 시간에 빛바랜 죽음의 전율을 회상하는 노년들. ‘시간이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명제는 가혹하지만 쾌락의 기억마저 파괴하진 못한다. 거기엔 아직 쾌락의 흔적이 있고 돌이킬 수 없는 탐미가 있다.
<돌이킬 수 없는>이란 제목은 그러므로 무시무종으로 흐르는 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노출된 인간에 깃든 현기증의 시간, 돌이킬 수 없는 폭발(빅뱅?)인 한 인간과 우주의 탄생 이후 시간을 뜻한다.
시간을 거슬러 가는 문법의 능청스러움. 혼돈으로부터 평화로, 라니, 얼마나 역설적인가? 그래도 인간은 꿈꿀 수 있다고 말하는 걸까? 아니면, 미래를 기억하라고,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그 곳을 기억하라고 이죽대는 걸까?
폭행범 테니아는 동성애자의 방식으로, 딸을 범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녀를 폭행한다. 성폭행범과 근친상간을 추억하는 벌거벗은 사내 얼굴은 오버랩한다. 고통의 살아있는 표정, 영원히 울려퍼질 듯한 울부짖음... 그러나 폭력은 피해자의 얼굴을 지운다. 비명조차 침묵시키고 고통의 표정조차 지워버린다. 극단의 가학 충동은 한 인간의 얼굴을 지워 무로 되돌려버리려 한다. 상대의 얼굴이 갖는 모든 사회적 표지를 부정하고 말살하려는 절대적 힘으로 나타난다.
그가 내뱉는 독설도 현란하다. 그녀의 미모와 몸매, 옷차림에서 가진 자, 예쁜 자... 사회의 주류 권력을 읽으며 저주하고 짓밟는다. 그래서 그는 철두철미 모욕적이고 파괴적이다. 동성애자의 방식을 취한 성행위와 얼굴을 부수는 가학은 하나의 사회적 행위이자 미시권력의 전투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타인의 얼굴을 짓이긴 자의 얼굴도 결국은 뭉개져, 보다 격렬하게 뒤틀리고 지워질 것이다. 범인의 얼굴을 지운 자가 섹스에 서툰 사내란 설정은 흥미롭다.
피에르는 모든 걸 말로 이해하고 표현한다. 알렉스는 그에게 섹스는 몸으로 하지 말로 하는 게 아니라고, 상대가 아니라 자신에 몰두하라고 충고한다. 말하고 이해하는 자와 규정하는 권력은 멀지 않다. 그는 또한 반듯하게 차려입었다. 알렉스를 폭행하던 놈도 정장 차림이었다. 홍등 아래 흔들리는 탐닉과 도취의 애스홀(ass hall). 그곳의 벌거벗은 덩치들은 무기력하다. 오직 몸의 욕망에 순종하며 같은 말만 중얼댄다. 벌거벗은 무리 중에서 여전히 테니아 혼자만 차려입고 있다. 그의 옷차림은 변태적 이중성을, 위선과 권력의지를 암시한다. 가해자로 만날 정장차림의 두 사내. 권력의 구도가 드러난다. 입은 자와 벗은 자, 폭력은 궁극 누구의 전유물일까?
마르쿠스는 성(sex)을 말하지 않는다. 몸소 사랑한다. 그는 애스홀의 게이들과 다른 의미에서 자유롭게 벗은 자이다. 그의 벗은 몸은 분방하고 자유롭다. 자유롭기에 권력이 될 수 없다. 복수하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그는 처벌하는 권력과는 거리가 멀다. 가슴이 원하는 대로 몰두할 뿐이다. 자유롭게 사랑하고 즐기는 어린애의 영혼, 마냥 흥분만 하는 그는 비극 앞에서 철저히 무력하다. 복수의 실행자는 앞뒤 없이 날뛰는 마르쿠스가 아니라 반듯하게 차려입고 말로써 상황을 이해하는 피에르다.
옷과 몸이 신분의 표지로 발언한다면, 불행한 여자 알렉스의 미모와 멋진 의상은 자신의 의도나 실제와 무관하게 남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테니아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외모의 덫에 사로잡혀 버렸다. 알렉스를 폭행하며 테니아 역시 끝도 없이 지껄임으로써 자기모순에 빠진다. 자신이 사이비임을 폭로한다. 가짜는 진짜에 의해 처벌된다. 테니아에 대한 복수는 처벌의 의미를 갖는다. 주류를 가장하며 양다리를 걸친 사이비 권력인 그는 지워져야 한다. 말하는 자, 진정으로 옷 입은 자의 권력은 말과 몸, 벗은 자와 입은 자의 경계를 유린하던 얼굴을 끝내 지워버린다...
카메라는 알렉스의 방에 걸린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포스터를 거푸 클로즈업한다. 저 SF적 창세 신화는 무얼 암시하려는 걸까? 인간은 그저 끝없이 발생을 되풀이할 뿐이라고? 그러나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아니 우주 발생을 되풀이한다.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먼 우주공간을 가로질러 만난 창세의 비밀은 우리 자신의 초상이었다. 생로병사하는 인간 실존의 모습이었다. 너 자신을 알라? 우주의 비밀이 인간의 비밀과 다르지 않으며, 한 인간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였다.
초원에 누운 그녀는 막 발생을 시작한 한 우주를 꿈꾼다. 소용돌이치며 열리는 발생을 축복하듯 천진무구로 뛰노는 어린애들의 머리 위로 베토벤 교향곡 7번의 ‘불멸의 알레그레토’가 울려퍼진다. <스페이스 오딧세이>라면 ‘블루 다뉴브’가 출렁이던 거기쯤이다. 돌연 필름은 끊기고 세계는 투명한 무(無) 속으로 던져진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영화는 기존의 문법을 파괴한다. 아니, 가장 영화적 문법을 구사한다. 대부분의 잘 만든 영화처럼 짜임새 있는 서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럼에도 지극히 계산된 캐릭터의 설정, 경련하고 발작하는 카메라(거의 돌아버릴 지경이다), ‘영화는 보여주는 것’이란 모토에 걸맞게 교활하게 배치된 이미지들의 은유, 질리게 만드는 음향 효과 등은 일관되고 치밀한 편이다. 고심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결코 즐겨 볼 영화는 아니다.
덧붙여;
모니카 벨루치는 비디오로 보았던 <라 빠르망>이 좋았다. 영화의 절묘한 구성도 훌륭했지만 그녀의 젊음과 미모는 더없이 빛났었다. 나이 들며 매력을 더하는 배우도 있고 그 반대도 있다. <말레나>에 이르러 좋은 연기에도 불구하고 빛나던 무엇이 사라진 듯했다. 이 영화에서도 힘든 연기는 훌륭했지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부담스런 느낌이다. 왜 그럴까, 시간이 모든 걸 파괴하는 걸까...?
* 얼굴은 타자성이다. 가장 내 것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가장 많이 보여지는 곳이고, 내 것이되 남들이 더 익숙한 곳이다. 우리는 대부분 얼굴로 사람을 식별한다. 내 얼굴을 내 놓는다는 것과 누군가의 얼굴을 본다는 것. 그 얼굴과 얼굴이 만남은 ‘나’로 동일시될 수 없는 다름의 명백한 표현이며 그에 대한 배려의 요구이다. 동일화를 강요하는 옷 입은 자들은 전체주의적으로 타인의 얼굴을 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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