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명 : 태극기 휘날리며 (2004)
감독 : 강제규
늘 보아오던 극장의 풍경이 아니었다. 평일임에도 사람들은 많았고 중년 이상 연령층의 비율은 놀라웠다. 할머니들도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일까?
애초 그다지 보고 싶었던 영화도 아니었고, 보고 나서도 수작이란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데 기어이 난 왜 왔을까? <실미도>도 그랬었다. 왜일까...?
극장문을 나서며 요즘 읽고 있는 소설의 구절들을 떠올린다. ‘기원을 잃어버린 존재.’ 출생 이전의 잃어버린 기억을 몸에 지니고 태어나는 태생동물들. 그들에겐 ‘출생 이전의 한 삶이 있다...’
그것이었을까? 6.25는 지금도 역사가 아니란 것? 비틀린 채 끈질기게 이어지는 삶의 선천적 조건이란 것? 그 삶의 사라진 기원, 이데올로기로 소독되고 폭력과 주술의 언어로 봉인 - 실미도가 그 하나인 - 되어 마침내 화석이 되어버린 시공간이 바로 그곳이라서? 가상현실이 현실을 앞질러가는 초현대를 살면서도 분단이라는 기이한 원현상에 사로잡혀 있는 몸들. 그 몸들은 단지 한편의 영화가 아니라 침묵에 싸인 어두운 기원, 현재 우리 삶을 이루는 모든 언어를 생겨나게 한 격렬했던 몸짓과 소음을 향해 거슬러 오르고 있는지 모른다.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죽어 다시 태어나기 위해 모천회귀하는 물고기떼처럼 말이다...
6.25가 단지 상처라면 우린 그저 집단 후유장애를 앓고 있는 것일 터이다. 그게 상처였다면 천천히 아물며 역사 속으로 흘러들었을 것이다. 신파는 가끔 그 상처를 들추고 호호 입김을 불며 다독거린다. 그러나 육이오는 상처 따위가 아니었다.
그건 역사도 아니다. 역사 이전이며 창세의 대폭발 같은 것이다. 전쟁이 끝난 곳에서 비로소 역사는 시작한다. 폭발의 소음은 용암처럼 흘러내리며 언어로 굳어간다. 추방된 자, 거기서 태어난 자인 우리들은 뒤돌아본다. 성장을 멈춘 ‘올드보이’인 동생은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한 아버지인 형의 입을 빌어 말없이 소리친다.
“나 돌아갈래...!!”
물론 이건 <박하사탕> 설경구의 대사다. 그러나 이게 두시간반 동안 지루하게 질러대는 이 영화의 절규인 것 같다.
수많은 장면이 하나로 겹쳐진다. 지옥의 아귀처럼 검게 물든 얼굴로 마주 총을 겨누는 두 형제의 모습에선 <쉬리>의 기시감이 너무도 뚜렷이 솟는다. 그런가 하면 성공과 실패가 반반인 <가을의 전설>이 후경으로 깔리고,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장중한 사랑 이야기도 형제애로 변주되어 낮게 울린다. 헐리우드를 발견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남의 얘기가 아니다. 떠도는 이미지가 아니라 삶에 침입하려는, 그래서 이 영화는 신파 외에는 길이 없는, 그러나 신파 이상을 요구하는 몹시 가혹한, 한국현대사의 창세 신화 같기도 하다.
난 신화가 싫다. 누군가의 말처럼 신화는 집단의 언어다. 모든 빛과 어둠을 빨아들여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언어로 거짓 원형을 빚는다. 언어만을 최초로 우뚝케 한다. 언어 이전의 침묵조차 언어로 빚어놓는다. 말해질 수 없는 것을 감히 말하는 언어는 거짓이다.
그렇게 이데올로기는 태어난다. 공산주의, 자본주의만이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가족과 형제조차 언어로 태어나면 더 이상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된다. 그것은 사회로, 국가로, ‘우리’로 자라며, 언어 현상의 가장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극단인 전쟁을 낳는다. 전쟁을 더욱 잔인한 것으로 만든다. 전쟁이란 극에 이르러 날카롭게 물질화한 언어다. 우린 동물의 잔인을 말하지만 잔인함은 순전히 인간의 것이다. 집단의 언어인 신화는 그러므로 이데올로기다. 인간은 신화를 가질 수 있기에 잔인하다.
이 영화는 국가와 이념을 비켜가거나 맞서려 하지만, 정작 비켜가는 건 삶의 말없는 박진함이다. 기어이 이데올로기화하며 끝없이 되풀이되는 ‘가족과 형제’를 외치는 목소리는 삶의 침묵하는 이미지를 가두고 질식시켜 버린다. 그게 비록 사랑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질식시키는 사랑 이야기를 우리는 많이 보아 온 터이다. 언어의 빛과 시선이 존재의 어두운 몸짓을 사로잡는 것이다. 전쟁 발발 전, 돌아갈 수 없는 그 곳에서, 말로 표현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굳이 입에 올리는 그들의 모습이 어색했던 건 그래서일 게다. 감히 말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말이 되어 흐르고, 과잉되는 이미지는 언어로 굳는다. 신파가 태어난다.
6.25라는 진공의 어둠이 빨아들이는 선사의 빛과 거기서 시작하는 역사의 빛은 지독히 단조롭다. 아직도 역사는 근대의 결핍 속에서 허우적대지만, 우리 삶은 기억 상실의 성장 장애에 시달린다. 잃어버린 것이 사라진 곳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감독과 관객, 우리 모두 성장 장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는 말없이 떠도는 것들을 부르는 초혼의 굿판을 차려놓고 죽은 자들의 춤을 언어로 번역하며 설교를 늘어놓는다. 그건 헐리우드의 공식이다. 신파는 기원의 이미지를 삶의 진실이 아니라 구슬리는 언어로 가져간다.
언어에 의해 선사는 역사에 장악되는 듯하지만 다시금 기억 저편의 침묵 속으로 달아난다.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그곳은 여전히 어둡고 묵묵하다. 분단의 역사는 계속되고 폭발의 빛 너머 선사의 그곳은 여전히 어둠이다. 물고기떼는 오늘도 필사적으로 강을 거슬러 오른다. 비록 그게 길을 잘못 든 다른 강이거나 흐르지 않는 ‘미스틱 리버’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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