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명 : 올드보이 (2003)
감독 : 박찬욱
무게에 관한 두 극단적 상상력. 둘을 함께 보았다. 서로가 더 재미있다.
<킬빌>은 농담마냥 날아오르고 <올드보이>는 핏빛으로 굳은 시간처럼 무겁다. 한쪽은 일체의 질문은 던져두고 광속으로 떨어지는 칼날 위의 빛을 탐하고 다른 쪽은 시종일관 왜? 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무겁게 가라앉는다. 우마 서먼과 최민식의 거리는 한없이 멀지만 끝에서 만날 성 싶고, 가운데를 떠도는 유지태는 오히려 모래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침몰한다.
<킬빌>은 음악으로 시작해서 음악으로 끝난다. 멋진 동화를 알리는 뱅~뱅~, 살인의 짜릿함에 떠는 경쾌한 휘파람 소리, 오버의 극치를 달리는 애니의 배경음악, 그리고 눈밭에 휘날리던 일본 음악... 흐르고 흐르는 노래에 실려 가벼움은 날아간다. <올드보이>는 별 기억나는 음악이 없다. 있었겠지만 오히려 거기 짓눌려 있었겠지.
오대수는 끝없이 왜? 라고 물으며 제 무게를 더한다. 유지태는 잘해야 비길 수밖에 없는 게임을 벌여놓고 한껏 가벼워지고 싶다. 그의 손짓과 걸음걸이는 슬프도록 우아하다. 그래서 얼마나 더 가벼워지는가.
왜? 라고 묻지 않는 가벼움으로 우마 서먼은 질주한다. 훈련된 킬러인 그녀는 최민식이나 유지태처럼 ‘존재의 무게’란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착 붙는 노란 추리닝을 입고 오토바이를 달리고 펄펄 날며 칼을 휘두를 뿐이다. 복수의 노란 추리닝은 이소룡에 바치는 발랄한 연가라고 아는 이들은 아는 체 했지만, 어떤 차림이 그보다 더 가벼울 수 있을까? 피에 젖은 노란 그녀가 펼치는 식당의 대혈겁조차 수채화로 가볍다. 사방으로 뿌려지는 선혈은 응고하지 않고 타오르듯 휘날린다. 빛과 색채의 현란한 무도회.
절묘하게 낀 단편같은 애니메이션의 탐미는 또 어떤가. 너무 지독하여 현기증이 난다. 칼끝을 타고 뺨으로 떨어지는 핏방울은 눈물과 섞인다. 도무지 저런 삼류적 신파가 주는 짜릿함을 타란티노 감독은 얄밉도록 꿰뚫는다. 마지막 눈밭의 결전 장면은 거의 황홀하다. 뚜껑(!)이 날아간 루시 리우의 같잖기 짝이 없는 마지막 대사는 절정의 유치찬란이다. 온몸을 간지럽힌다.
그에 비해 망치를 든 최민식의 그림은 진하고 무겁다. 사설감옥의 복도에서 펼치는 일당백의 육박전은 서양의 성화나 역동 넘치는 낭만주의 유화 한 폭이다. 이념 혹은 실존의 무게가 짙게 드리워진다. 박찬욱 감독은 그토록 무겁다. 안쓰러울 정도다.
두 올드보이 - 나이만 겉먹었지 성숙이 멈추었거나, 반대로 조숙한 애늙은이거나 - 의 무게에 관한 게임. 전작들처럼 박찬욱 감독은 대책없이 가해지는 외적 억압이나 폭력에 한 개인이 어떻게 무너져 가는지를 냉혹한 열정으로 그려낸다.
사실, 잘만 그려졌다면 최민식보다 유지태가 더 매력적인 캐릭터일지 모른다. 색 바랜 슬픔이 어린 헛된 우아함 혹은 덧없는 가벼움. 그 날 이래 성장을 멈추고 영원한 소년으로 남았다. 정지한 시간이란 영원이다. 사랑과 고통의 기억도 영원이 된다. 영원을 살아온 자만의 권태. 최민식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엔 어떤 적의도 없다. 연민의 흔적조차 오랜 것인 양 가물거린다. 아마 그는 게임오버의 환멸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겉늙은 애노인이며 모순덩어리인 그는 모호하다. 삶의 권태와 고통을 함께 맛본 자다. 존재의 한없는 가벼움과 무거움이 함께 머문다. 그의 복수조차 복수가 아니다. (그래서 그의 연기를 두고 찬반이 엇갈리지 않을까 싶다.) 그 모순은 게임을 지탱하고 결국 모래알과 바위의 무게로 그들을 가라앉힌다. 가라앉는 것들은 증발의 가벼움을 꿈꾼다.
누가 먼저 가라앉을지는 질문이 되지 못한다. 왜? 라는 질문은 게임오버를 유도하지만, 그 질문이 꼭 최민식만의 것이 아니다. 두 올드보이가 같이 꾸는 꿈 또는 현실이 영화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왜? 라는 질문은 각각에게 되돌아가는 칼날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차라리 허무 개그다. 떠오르려는 바윗뎅이, 게임은 끝났지만 삼켜지지 않는 앙금은 처치곤란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 익명의 아나키스트들이 등장하듯, 최민식 자신이 개그맨이 되어 자신의 그림자 또는 스쳐가는 개그우먼과 공허한 침묵의 유령놀이를 벌인다.
박찬욱 감독은 ‘모래알이나 바윗뎅이나 가라앉긴 마찬가지’인 부조리한 존재의 무게를 흡혈적으로 탐색하지만, 그의 영화가 늘 그랬듯 무게의 상상력은 암울하다. 참혹하게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져 마침내 투명해진다. 심연으로부터 울려오는 독백만 오래도록 떠돈다.
눈 밝은 이는 <킬빌>에서 동양에 대한 뿌리깊은 서구의 편견(오리엔탈리즘)을 발견하지만 그다지 동의하고 싶진 않다. 만화적 상상력이 펼치는 오감의 입체적 자극만으로 충분하다. 빛과 색채의 상상력, 거기에 승패를 가름하는 속도가 더해졌을 뿐 아닌가. 무게란 애당초 없었던 거다. 그래서 솟구치는 피는 떨어지기 전에 휘발한다. 굳이 무게를 말하자면 대기적 상상력이다. 반면 <올드보이>의 피는 응고하고 침전한다. 뿌려지는 그만큼의 중력으로 되돌아온다. 치명적이다.
덧붙여, <킬빌>이 다시 보고 싶은 영화라면 <올드보이>는 극장을 나서 좀 더 음미하고픈 영화였다.
올드 보이
폐소 ; 최민식이 갇힌 감옥. 티비는 바깥과의 소통 혹은 밖으로의 통로가 아니라 안으로의 일방적 침입이다. 커뮤니케이션의 도구가 억압의 도구가 된다.
납작해지지 않기 위해 몸을 단련한다. 억압에 저항하는 유일한 몸, 단단해진다. 복수의 일념과 무기가 된 몸이 하나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파열할 듯, 곤두선 머리털. 핏발선 눈. 날것을 삼키는 입.
깊고 푸른 감옥에서 그는 옥상으로 풀려나 투신자살하려는 사내와 마주친다. 왜 옥상인가.
햇볕의 전면적 쇄도, 엄습. 선글라스. 그는 빛에 익숙지 않다. 어둠, 그늘에 오래 있었다. 욕망의 어둡고 습한 통로는 늘 쾌락으로 연결된다. 풀려났으나 그는 갇혀있다. ‘왜’라는 질문.
빛을 견디지 못하는 자는 말도 견디지 못한다.
올드보이의 무게는 몸부림칠수록 가라앉는 덫이다. 운명과 같지만 게임이다. 운명을 게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가벼움이다. 유희. 운명의 유희를 기꺼이 받아들일 때 그는 떠오르면서 수면 위에 길게 누워 햇빛을 볼 수 있다.
킬빌
주방. 주방의 결투, 식당의 결투. 칼 만드는 달인도 식당에서 일한다. 킬빌의 주무대는 먹는 공간이다. 단지 먹고 사는 일에 대한 혐오? 권태? 일상을 뭉개 버리기, 단칼에 베어 버리기.
속도는 방향(상하)을 결정짓고 무게를 나른다. 무겁게 느려지는 대지, 가볍게 가속하는 상승. 영화 <킬빌>과 <올드보이>는 그런 관점에서 공기와 대지의 상상력에 조응한다.
킬빌에서는 늘 속도가 문제다. 느린 건 죽음이다. 올드보이에선 속도가 문제가 아니다. 가벼워야 산다. 모래나 바위는 크기에 불구하고 무거움에선 마찬가지다. 솟아오르는 가벼움이 아니라면 땅에 이끌리긴 매일반이다. 기화하거나 응고하거나 - 꿈에 빠져버리거나, 생각에 잠겨버리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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