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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책

블랙 호크 다운 - 사악한 눈길, 전쟁의 무표정을 넘보다

by 숲길로 2007. 9. 1.

 

 

영화명 : 블랙 호크 다운 (2001)

감독 : 리들리 스콧

출연 :

 

 국가나 정치, 이념 따위를 주절대지 않고 ‘전쟁 그 자체’를 보여준다고?

그런 요상한 광고에 속다니! 하긴 ‘리들리 스콧’ 상표였다....


한 마디로 사악한 영화다. 그리고 흥미진진하다. 9.11 테러가 그랬듯.

인간의 일이면서도 철저히 비인간적인 현상이 전쟁이다. 그건 리얼리즘이다. 있는 그대로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사람이 상상하고 연출하는 최후의 현실이면서 마침내 사람의 한계를 넘어간다는 점에서. 

모든 전쟁은 기어이 한계 너머의 광기로 수행되며, 전쟁 밖에 있는 자들에겐 일종의 가상현실 또는 유리벽 너머의 현실이란 점에서 이중의 비현실이다. 그곳의 언어는 여기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다. 거기 있었던 자가 돌아올 수 있는 현실은 없으며, 그 체험은 영원히 한 인간의 심연으로 남는다. 무공훈장이 매달린 살아남은 가슴과 그 전쟁을 기획한 자의 가슴의 거리...  


영화는 전쟁체험을 충실히 모았다. 치밀하게 짜여진 입체화다. 건너갈 수 없지만 막연히 느끼고 이해하려 애쓰는 거리 너머의 현실을 최고의 박진으로 보여준다. 죽음을 요구하는 전쟁과 살아남으려는 자의 지루한 사투는 메마르고 뜨겁다(dry & hot!).

그러나 차츰 체험은 왜곡되고 악의적인 편견에 기울어진다. 결국 잘 요리한 ‘어느 양키 전사의 살아남기’ 한판이 되었다. ‘전쟁 그 자체를 표현했다‘는 찬사는 터무니없다. 

 

원작 소설의 부제라는 ‘현대의 전쟁’은 역설이다. 어떤 전쟁도 그 자체로는 전혀 현대적이 아니다. ‘현대’는 전쟁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을 통제하고 바라보는 시선에 있다. 영화는 절대 폭력의 공간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들을 성실하고 냉정하게 관찰하고 보고하려 했지만 ‘전쟁 그 자체’를 보여주는 데는 실패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끔찍하고 치열한 살아있는 전쟁의 구성 요소들을 객관적으로 살피고 드러내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대(모던)적 이성 대신 짐짓 포스트모던한 표정을 짓는다. 퇴각하는 전사를 이끄는 춤의 무구한 몸놀림, 주검을 안고 가는 몸의 율동들... 이미 갈 데까지 갔다 온 전사들과 함께 구체성을 잃은 인간과 사물의 그림자를 황량한 모래 위에 던져 놓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어떤 보편적인 이미지나 의미가 솟아나는가?

그래도 재밌잖냐고? 맞다. 그러나 문제거리는 재밋거리를 넘친다. <진주만>의 유아적 화법은 피했지만 양키즘의 이분법 도식은 여전하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계산에서 출발한 전쟁이 마침내 극단의 비현실적 현실, 비인간적 현상이 되고 마는 것은 누군가의 대사가 암시하듯, 폭력 외에는 아무런 대응 수단도 허용하지 않는 환경이 바로 전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현대전에서 사막의 전사들은 모습 없는 적 대신 폭탄이 작렬하는 자신들의 도시를 저주해야 마땅하다).   

전쟁은 살아있다. 전쟁을 가장 역동적인 폭력현상으로 만드는 것은 살아있는 것들이다. 방대하고 위협적인 폭력을 구성하는 수많은 소말리아 군중들. 기관포를 퍼붓는 경헬기의 시선이 포착하는 참혹하도록 아름다운 살육 장면, 섬광 속에 피었다가 사라지는 - 그건 죽음의 빛이다 - 밤 도시 풍경, 정적 감도는 알 수 없는 공포, 소리 없이 다가오는 거대한 폭력은 낯익다. 마침내 도시는 살아 날뛰는 괴물이 될 것이란 예감...

사투하며 뚫고 나아가는 도시의 미로는 바로 에일리언의 뱃속이 아닌가. 적들은 괴물의 촉수처럼 미로를 헤치며 끊임없이 엄습한다. 에일리언의 깊고 장대한 폭력의 공간은 아프리카의 어느 도시가 되어 되돌아왔다.

자신의 먼 전작으로 돌아가 전쟁의 물리적 시공간을 길어오는 솜씨는 - 단언컨대, 그것은 어떤 은유도 성찰도 아니다 - 노련일까 노회일까?  양키즘 영화 중에서도 단연 빼어난 사악함의 성취는 바로 그 솜씨에 빚지고 있다.

 


 

전우애는 죽기 아니면 살기가 전부인 극히 동물적인 상황에서 인간종이 발휘하는 최적의 생존전략이자, 유일한 의사소통 코드다. 그걸 합리나 문명의 용어로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삶은 무조건의 선이다. 영화가 전우애를 들먹거린 건 의미심장하다. 낮은 목소리로 다짐하는 비합리주의 선언이며, 나는 삶이요 너는 죽음이라는 선언이다.

‘전쟁 그 자체’를 만드는 마법의 공식을 보자.

논리적으로 본다면, 전쟁의 주체를 ‘포스트모던’하게 증발시켜 버리면 전쟁만 남는다. (물론 말도 안 되는 불가능이다). 절반의 성공! 적은 사라졌다. ‘전쟁 그 자체’의 일부가 되었다. 사라질 수도 없고, 사라져서도 안 되는 나(우리=양키)와 전쟁 그 자체의 사투만 남았다. 삼빡하다. 

이제 안에서 전쟁을 보는 시선과 밖의 시선을 통일시키는 것이다. 논리적 오류에 기대는 고전적 수법이다. 영화는 명백하고 단순한 진실 앞에서 분열을 일으키며 삐걱거린다.

적군은 인간을 박탈당하고 모호하게 뭉뚱그려져 에일리언이 된다. 적을 포함한 모든 자연과 시간, 공간은 단지 인간(양키)에 적대하는 폭력적 환경 - 이게 전쟁 그 자체란다 - 일 뿐이다. 결국 ‘양키 만세!’ 를 외친다. 생존게임을 가장한 정치를 선택한다.

70년대 냉전 영화조차 적의 표정까지 뺏진 않았다. <진주만>은 유치하지만 솔직했다. “난 이 수준에서 놀겠어”라고 멍석을 깐다. 접을 건 접고 시원하고 일관되게 풀었기에 파괴본능 넘치는 전자오락 한판으로 성공했다. 그런데 이건?

이런 걸 포스트모던이라고 하나? 주체 없는 전쟁. 전쟁이 전쟁을 한다? 전쟁이 전쟁을 무성생식해서 자신의 적으로 삼고 전쟁을 벌이는가?  그런 걸 보여주고 싶었던 흔적은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나 어울릴 법한, 전쟁으로 망가지거나 전쟁을 초월한 원초적(?) 인간들의 그림자가 유령처럼 일렁거린다.

 

그러나 분명히 하자. 사악함 없이 전쟁의 결과물과 전쟁을 대립시키는 비논리적인 전쟁 이해 방식은 고도의 신중함과 성찰을 요한다. 자연과 전쟁을 대비하는 것도 번지수가 틀렸다. 그건 <씬레드라인> 몫이지, 여기선 완전 헛다리다. 결국 양키즘 영화의 가장 사악한 공식을 안 그런 척하며 되풀이했다. 감독의 재능에 그 넘의 미제국 신민권이 똥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