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명 :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2000)
감독 : 류승완
왜 미학이 아니라 사회학이냐고?
그건 자막이 오르고 남겨진 시간에 담긴 감동의 몫이다. 고스란히 벅찬 감동을 선사한 감독과 배우의 몫이다. 미학으로의 이행 혹은 고양을 통해서만 영화의 사회학은 완성되어야 한다.
영화를 본 직후, 이 힘있는 영화의 느낌을 감히 정리할 수 없었다. 또 몹시 위험한 영화라고 느꼈다. 적잖은 내 나이에 감히 폭력의 경외에 몸을 떨게 하다니... 도대체, 누가, 어떻게 저런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단 말인가?
섣불리 운명을 얘기하고 싶진 않다. 오히려 우연이라 함이 맞다. 그 점에서 <박하사탕>의 모티브와 얼개를 닮았다. 돌아가야 하는 어떤 원점. 시공을 거슬러 돌아갈 수 없다면 지금 이 순간, 모든 흐름의 분류(奔流)를 모아 태초의 폭발처럼 터뜨려 버릴 수밖에 없는 벅찬 짓눌림. 그러나 현실을 사는 자들에겐 늘 최후의 돌파구가 있다. 폭력!
즉자적이며 직접적인 물리적 운동성과 그 효과만을 전부로 취하는 것. 온전한 힘에의 몰입이란 몸가진 인간이 세상과 대면하는 최초의 시간에 가졌었고, 또 절망의 극한에서 최후로 몸을 던지는 어떤 계시의 빛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힘은, 폭력은, 복잡한 세상에서 나만의 영역을 구축키 위한 가장 오래고 확실한 방편인 셈이다. 그러나 동시에 폭력은 그 모든 것을 박탈하는, 나에게 확보되자마자 나의 대립물이 되어 나를 죽이고 마는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또 이 모든 얘기는 거짓이기도 하다. 폭력은 우리 삶의 가장 가난한 방식일 뿐이다. 그건 합리의 이름으로 조직된 위선과 생존경쟁의 그물망을 효과적으로 찢어내는 칼날이거나 적절한 탈출구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망의 가장 거칠고 비릿한 몇몇 그물코를 이룬다. 폭력은 조직되고 편입되는 것이다. 숙명은 거기서 눈을 뜬다.
그물의 가장 반대편에 있는 매듭들도 동일한 줄기의 양극이라면 서로 닮아 있으며 결국은 만난다. 휘어진 공간에서 가장 먼 두 점이 실은 가장 가깝듯이... 모든 소외된 자들은 뫼비우스의 띠 위로 모여든다. 한 점에서 출발하여 서로 반대방향으로 달리는 두 점은 결국 출발점에서 다시 만난다. 서로가 서로의 뒷면을 이루며 지배한다. 그래서 숙명조차 사회현실 속에서 조직되고 조작되는 어떤 것이다. 그걸 깨달은 자는 절망해야 한다.
시야로 뛰어드는 치기 어린 탐닉은 방임된다. 아니, 가학으로 달구어져 더욱 조장된다. 악몽은 절망의 환상으로 변질되고, 숙명은 영원히 이르지 못할 도피처로 자리잡는다. 남은 문제는 속도다. 침묵의 기다림과 숨가쁜 뜀박질, 긴장과 공포가 그들을 살아있게 한다. 절망을 향한 정면돌파. 순간, 폭력은 빛난다.
움직이기, 가장 빨리 움직이기, 그러나 빛보다 빨리 움직이는 건 없다. 빛은 한계속도이자 사물이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다. (그러므로) 빛으로 되기!
영화는 그 순간을 포착한다. 격렬한 집단 난투에서, 버림받은 두 욕망의 처절한 격투의 속도에서 움직임 자체가 빛이 된다. 가쁜 호흡들.... 스스로 느끼고 있었을까? 광속이 누비는 평면의 영상에서 자신의 몸이 무수한 사선의 빛살로 퇴적하고 있었음을? 움직이는 몸은 신비롭다. 건달과 춤꾼의 걸음걸이가 닮은 건 그 때문일 거다. 율동의 완급과 호흡의 깊이는 달라도 그들은 움직임 속에서만 살아있는 신체를 공유한다.
빛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가? 율동하는 신체는 비수 앞에서 무력하다. 금속의 본성은 차고 단단함이다. 부드럽고 따뜻한 살아있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 그래서 선택된 차게 빛나는 최후의 필살기다. 인간적인 모든 것을 배반하는 차가운 비웃음.
그러나 궁극의 승자는 어둠이다. 한낮의 빛이 기약 없이 스러져 잠기는 곳이 밤의 영원임은 당연하지 않은가? 빛을 잃은 사내의 검은 눈이 더욱 빛난다는 놀라운 사실, 흑백화면의 음란한 간계다. 어둠의 표상이 어둠을 거역한다는 것은 비극적인 역설 아닌가? 황량한 지상에 내던져진 죽음 위로 에레미야의 저주스런 외침이 울려 퍼진다.
시공간은 한낱 환상이라던가. 움직임이 없다면 시공도 없다. 허락하며 가두는, 가능성이자 한계다. 그게 진실이라 해도 우리가 운동 없이 살 수 있을까? 빛이고자 하는 욕망 없이 하루라도 살 수 있을까? 그렇다면 자유는 존재의 필연법칙인 운동을 포기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일까?
사회학이고자 했던 유치한 감상은 영화가 성공한 거기서 실패한다. 한바탕 묵시록의 배후 혹은 하늘은 텅 비어 있다. 화면 위에, 영화의 구성에 포착되지 않은 너머엔 상투적으로 반복되는 무수한 동영상이 있을 뿐이다. 회귀는 불가능하다. 살아 돌아갈 시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살고자, 운동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안팎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 위에 머물러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 기어코 만남을 원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남은 답은, 죽거나 나쁘거나. 둘 중에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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