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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책

욕망 - 그에게서 나를 보다

by 숲길로 2007. 9. 1.

 

 

 

감독 : 김응수

주연 이동규, 수아 


남녀는 차창 너머 검은 가지 무성한 겨울의 나무들을 본다. 푸른 허공으로 대책 없이 엉키며 뻗는 욕망의 실핏줄들... 아득한 우듬지는 다만 욕망의 고도, 물고 물리는 허깃증의 심연일 따름이다.


참 스산한 영화다. 차고 무겁지만 가볍기도 하다. 목소리는 가끔씩 터지는 신음과 비명을 위해서만 있는 듯, 말은 거의 없고 웃지도 않는다. 그다지 줄거리랄 것도 없다. 이미지들이 쌓이고 쌓여 어떤 깊이나 명료함에 이르는 게 아니라, 풍경들이 말없이 나열되고 사라지고 다시 반복한다. 그래서 관객도 영화 속 인물들 못지않게 답답하다.

동성애와 기묘한 관계의 불륜이 이야기를 만들어 가지만 그것들도 차라리 풍경의 일부이다. 불친절한 감독은, 노골적인 제목이 다 말하고 있으니 닥치고 참을성 있게 따라가 보란다.

 

 


그녀는 자유를 꿈꾼다. 그로부터? 그러나 그는 물질화한 그녀 자신의 욕망이 아닌가. 그에게 그녀는 무 아니면 욕망이다. 때로 보이지도 않는다. 투명인간처럼.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 마주 보고 있지만 거울이 한 시선을 가로채 간다. 그래서 시선은 늘 등을 향한다. 나는 그를 보고 있지만, 실은 나 자신을 보고 있거나 그가 보는 것을 본다. 결코 그를 바로 보지 못한다. 그의 욕망을 욕망한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기이한 욕망의 삼각형은, 그렇게 바바리코트의 남자나 호스트 빠를 드나드는 그녀의 친구들에게까지 이어지는 무한 연쇄를 이룬다. 

그들의 엇갈리는 시선과 몸을 포착하는 장면들은 작위적이지만 아주 치밀하고 강렬하다. 꽤 지겨운 영화를 흥미롭게 만든 건 (비디오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저런 영상의 아름다움이었다. 느리게 흘러가는 몸들이 그려내는 연옥의 풍경화...


욕망은 도처에 있다. 영화의 인물과 장소는 무국적이다. 시선이며 몸인 그들은 ‘어디에나’ 있으며 ‘누구나’이다. 로사, 레오 따위의 이름, 그들이 떠도는 공간은 파랑과 노랑의 원색 건물들과 뜻모를 외래어 상호들. 소도구들도 현란하고 장식적이지만 생명이 없어 보인다. 사물들은 풍부하지만 도시는 메말라 보이고 모든 게 인공적이다. 생명 없는 죽은 도시. 그들의 욕망처럼 불모성이다. 

욕망의 하얀 목덜미,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초상화와 눈만 있는 얼굴 괴물. 그것들은 은유가 아니라 욕망의 물질적 이미지들이다. 욕망은 시선이며 또한 타인의 욕망이다? 현학적이고 상투적이지만, 반복하여 나타나는 거울과 시선 이미지의 미학적인 성취는 나쁘지 않다.

연극적인 요소도 과감히 도입된다. 특히 영화의 절정에 있는 네 커플의 파티 장면은 뛰어나다. 이 영화의 가장 좋은 부분이라고 할 사람도 있겠다. 

 

 


영화의 처음과 끝은 맞물리며 닫힌다. 처음에 여자는 남편을 바라보는 거기 있었다. 출구를 찾아 날아오르지만 문득 뚝 떨어진다. 애증의 지루한 굴곡. 그러나 결국은 제자리다. 아니, 더욱 낮아진 곳인가. 안팎의 풍경이 다르지 않은, 안팎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돌지만 끝내 제자리다. 폭발해야 마땅하지만 아무도 폭발하지 않는다. 욕망이라는, 고난의 폐쇄회로...  

소통 없는 일방통행의 관계, 그것은 권력의 발생지며,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이다. 욕망을 통해, 또 욕망 자체를 지배하고 사고 판다. 따귀 때리기는 돈처럼 돌고 돌며, 갈망은 꼬리를 물고 그림자처럼 뒤를 밟는다. 권력과 소유의 궤도에 사로잡힌 몸들... 


낮고 무겁게 깔리는 첼로와 느닷없이 떨어지는 피아노 음향은 영화에 잘 어울린다(무슨 곡인지 궁금해 끝까지 자막을 기다리니 아르보 페르트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fratres’이다). 바하의 무반주 첼로도 좋다. 옆방을 엿보고 엿듣던 녀석이 즐기던, 카운터 테너 ‘요시가츠 메라’도 평소보다 덜 느끼하다. 성별을 가로질러 가는 목소리에 녀석의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