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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책

아이즈 와이드 셧 - 꿈꾸는 욕망의 미로

by 숲길로 2007. 9. 1.

 

 

 

 
영화명 : 아이즈 와이드 셧 (1999)
감독 : 스탠리 큐브릭

출연 :

 

어째 도통할 때도 넘은 노감독의 유작이 막막한 도회문명과 그 일상을 쪼개듯 관통하는 성적 욕망일까?

죽어도 벗지 못하는, 아니 죽어야 끝나는 집착. 두 눈 질끈 감으면(eyes wide shut) 사물은 빛을 놓치고 길은 끊긴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존재의 부유감, 매임 없이 흐르는 욕망이 기어이 가 닿는 관능의 세계라...

피안은 욕망 속에? 모든 현실을 던져버리고 점액의 유동을 따라 흐르면 몸은 더욱 농밀히 느껴져 온다. 두 눈 감으면 얻는 것은 몸이요, 잃는 것은 세계. 세계와 몸이 반드시 대립이 아니라 상즉(相卽)이라면 눈감은 몸은 또 다른 세계를 세운다. 미망이든 무명이든, 그렇게 태어난 세계는 몸과 마음의 분별을 지으며 또 한 하늘을 연다. 세계는 그렇게 누군가의 꿈으로 창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욕망은 이미 관계이고 사회다. 어쩔 수 없이 문화의 코드다. 순수한 환상이 사라진 시대, 항구적인 결핍과 과잉하는 생산은 축제를 누려야 할 몸의 자리에 욕망하는 몸과 성(性)을 빚어놓는다.

  

 

현실에 안주한 남녀관계를 슬그머니 흔들며 피어나는 성적 욕망의 꿈과, 꿈의 절정이 베푸는 비의적인 난교파티가 영화를 끌고가는 두 축이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의 줄기를 엮는 두 개의 꿈과 꿈에 삽입된 하나의 환타지가 있다. 그늘에서 엿보는 감독의 시선은 환타지로 하여 더욱 도드라진다. 서늘하게 밀고가는 통찰은 여전하나 조금 따뜻해졌고 나이답게 회고적인 구석이 있다. 씁쓸히 중얼거린다. ‘니들도 함 살아바바...’

스스로에게 진실하기란 별따기보다 어렵고, 진실하다면 현실에 충실할 수 없다. 거리나 간극은 메워지고 극복되는 게 아니라, 첨벙 뛰어들고 맞닥뜨려 뭉개지거나 회피될 뿐이다.

 

 


아내의 잠재한 성적 욕망을 본 남편은 충격과 혼란에 빠진다. 욕망은 감염되고 꿈은 꿈을 부른다. 거울이라 했던가? 반발과 호기심은 기어이 끝을 들여다본다. 욕망과 욕망하는 자는 둘이 아니다. 욕망을 완성하는 건 욕망하는 몸 자체다.

욕망의 모습은 다양하다. 상상의 욕망이 현실의 삶을 뒤흔든다. 현실을 벗어나고픈 음습하고 억눌린 욕망이 꿈보다 비현실적으로 실재한다. 그녀의 꿈과 꿈에 대한 남편의 상상, 그를 짝사랑하는 여자, 배회하는 밤거리와 몸파는 여자의 집과 난교파티가 벌어지는 밤의 고성... 모두 동등한 비현실이거나 현실이다. 꿈꾸어지지 않은 현실은 없고, 실제 아닌 꿈도 없다.

난교파티는 현실에 불려온 한편의 꿈이다. 고대에는 동서를 막론하고 그런 의례나 축제의 모습을 한 성의 향연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건 전혀 축제라기보다 사이비 종교집단의 비의를 연상시킨다.

 

 

 

단지 게임이라고? 그렇다. 그것도 남근들만의 게임이며 가면 쓴 욕망의 게임이다. 현대의 유일한 비의는 자본주의 자체일 뿐, 어떤 비의도 고유한 의미로 남을 수 없다. 가짜 딸을 팔아먹는 놈이나 난교파티의 주최자나 참석자는 다 똑같다. 노골적 거래를 숨기는 양식화되고 가면쓴 겉치레만 다르다. 돈이 만물을 이어주는 무한 교환의 세계는 영구불변한 어떤 것도 없다고 선언한지 오래다. 뒤틀리고 부풀어오른 남근의 욕망과 환상은 성의 익명적 유통 아래 숨은 현실의 위선을 반증한다.  

그 욕망이 향하고 돌아오는 곳은 어디일까? 다양한 욕망을 풀어놓는 동시에 모든 욕망을 하나로 환원하는 돈의 욕망이 거기라면 지나친 단언일까? 이 시대의 진정한 보편권력. 

어쩔 수 없이 삶은 비루하고 고단하다. 성을 둘러싼 어떤 놀이도 결코 진지하고 순수할 수 없으며 거래로 전락한다. 환상은 끊임없이 물화하며 사라진다. 가면을 벗어든 그는 꿈의 질식과 환멸을 본다.

 

  

꿈꾸는 밤이 가면을 벗어든 남자를 방황하게 할 때, 가면 옆에서 잠든 여자의 밤은 또다른 상상으로 부푼다. 자지러지며 - 너무 예쁘게 잘 웃는 니콜! - 남편을 유린한다. 유린? 가당치 않다. 이 영화를 다소 짓궂게, 부부애의 윤리와 가능성을 묻는 게임이라 여긴다면 순환논법에 빠진다. 사랑하니까 부부이고 부부니까 사랑한다? 충실과 부정의 각축은 꼬리를 물고 돈다. 배신이나 유린은 위선의 위태로운 언어다.

인간종 발생 이래 늘 그랬듯, 여자가 좀더 철이 들었다. (짜슥, 순진해 터지긴...) 사내의 머저리같은 얘기에 포복절도하며 꿈 얘기를 풀어놓는 여자는 그의 손을 끌어 벼랑 아래를 보여준다.

꿈조차 없다면, 가족과 기득권까지 팽개쳐버릴 하룻밤 열정조차 불가능하다면, 그런 미칠 듯한 상상조차 없다면 삶은 얼마나 지독할까? 그게 바로 지옥일까? 꿈과 현실은 서로가 서로를 부르는 두 벼랑의 현기증이거나, 서로를 숨쉬게 하는 그늘인지 모른다.

깨어 있다면 삶을 지속할 수 있다고 남녀는 우울하게 기대하지만, 깨어있는 그들을 이끄는 건 성탄 선물을 찾아다니는 딸이다. 두 눈 질끈 감고 감당해야 할 현실은 바로 그 애물단지다. 

마지막 장면, 그녀는 느닷없이 ‘하러 가자!’고 속삭이며 상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 버린다. 현실 너머를 엿보는 상상력이 사로잡힌 남근 욕망의 미로를 드러냈다면, 그것의 해체는 단지 발설되는 욕망, 아니 내뱉음으로써 돌연 솟아나 사로잡히지 않는 또 다른 욕망으로만 가능하단 뜻일까? 그게 깨어있음일까? 아님, 사랑은 더도 덜도 아닌 바로 그쯤이라고?

아니다, 그녀는 두눈 뜨고 문득 그 말을 내뱉음으로써 부정과 긍정을 동시에 성취한다. 한때의 꿈, 눈감은 욕망을 부정하는 듯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더욱 강하게 긍정한다. 멋진 계략이다. 가면 벗기를 죽음으로 여기던 사내의 비열한 이중성과, 한 순간 눈감은 도취에 삶의 전부를 거는 여자의 전략적 불균형은 단숨에 무너진다. 역시 여자가 한 수 위다. 하긴 뭐, 달리 방법이 있었을까...? 그녀의 표정은 조금 쓸쓸하다. 깨어있음이 뭐, 별다른 것이랴.

 

 

두눈 질끈 감지 않고 살아가는 나날이 과연 얼마나 될까? 지친 몸은 잠들고 잠들면 피어나는 온전한 욕망의 나라가 있다면, 깨어 있으려는 자가 몇이나 될까? 겨우 이틀 밤의 꿈과 거리만으로도 현실은 한없이 휘청거리고 일그러지는데... 어쩌면 우린 잠들었다 깨어나기를 되풀이하며, 양 기슭 사이를 흘러가는 삶의 출렁임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를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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