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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책

이노센스 - 모든 존재는 삶을 꿈꾼다

by 숲길로 2007. 9. 1.

 

 

영화명 : 이노센스 (2004)
감독 : 오시이 마모루

출연 :

 

압도하는 장대하고 현란한 그래픽과, 요설에 가까운 철학적이고 신비적인 인용구들이 난무하지만 그다지 새로운 것은 없어 보인다. <공각기동대>와 <아발론>의 문제의식을 하나로 묶어 한바탕 퍼질러 놓은 듯하다.

그러나 눈부신 시각 이미지는 도회의 잿빛 살풍경에 지친 눈을 씻어주고, 어지러운 요설은 바쁜 일상의 소음과 잡담에 굳어가는 귀와 머리를 따끈하게 해 준다. 그래서 이 도인 같은 대가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건 즐겁고도 고마운 일이다.

 

 

<공각기동대>가 제기한 기계와 인간의 차이에 대한 질문은 진부해졌다. 답이 없음은 그 질문 자체의 고대적 기원이 잘 말해주지만, 저러한 제기 방식조차 그렇다는 뜻이다. 현실보다 더욱 리얼한 가상현실 사이의 선택이라는 <아발론>의 사이비 윤리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 대답은 명백하지만, 이 영화는 아발론보다 한 걸음 더 내디디며 현란한 비주얼과 요설로 잠시 혼란을 안겨준다(이 혼란 또한 그가 주는 즐거움이다!).

 

답이 없을 듯한 질문을 꽤나 요란하고 포스트모던한 방식으로 던져놓고 감독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 아니, 현시점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정직한 답을 택한다. 결국 저러한 모든 철학적 윤리적 질문들을 삶의 문제로 귀착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노센스>라는 제목은 매우 시사적이고 선언적이다.

즉, 모든 삶은 무고하다. 동시에 모든 삶은 무고하지 않다. 매 순간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며 그에 따른 책임을 느껴야 한다. 그것은 기계든 인간이든, 꿈이든 현실이든 마찬가지다. 아발론의 그 개, 구체적인 욕구를 가진 존재가 다시 등장하고, 마지막에 쿠사나기 소령이 버트에게 멜로 영화에나 있을 법한 로맨틱한 멘트를 날리고 사라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어느 누구도 순수하지 못하다. 혼란스런 정체성에 드리워지는 장대한 환상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삶의 의지 그 자체는 역설적으로 순수하다.

모든 존재는 삶을 꿈꾼다. 그 명제 앞에서 네트 속으로 사라진 몸 없는 의식이나, 복사된 의식을 가진 기계나, 뇌만 남고 온 몸이 기계인 인간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이건 답이 아니라 회피일지 모른다. 그러나 오시이 마모루식 질문은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선택을 던지는 것이다. 기계와 인간의 경계, 현실과 가상현실의 선택은 앎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인 것이며, 그러한 실존윤리 앞에서 저 방대한 질문들은 사이비 윤리의 문제로 증발해 버린다. 우리 삶이 누군가의 꿈속에 있다 한들 누가 삶을 포기할 것인가? 꿈임을 알고도 깨지 않겠다면 그것이 과연 진실한 삶인가?


<이노센스>란 제목은 다가올, 아니 인간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이래 충분히 봉착해 온 저러한 선택, 언젠가 깨어질지도 모를 꿈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충분히 고민하고 있느냐를 다그치고 있는 게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