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명 : 러브 인 아프리카 (2001)
감독 : 카롤리네 링크
영화 보러 갈 때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나 <인도차이나>의 불편함을 다시 느껴야 할까...? 불안했고, 보는 중에는 아프리카의 장대한 풍광에도 불구 예상치 못한 홀로코스트(지나친 상품화로 식상을 넘어 신물 나는 주제가 되어버린)의 망령에 무겁게 짓눌렸고, 사랑타령도 아닌데 제목이 왜 <러브...>일까? 의문도 들었다(나중에 알았지만 원제는 Nowhere in Africa).
극장을 나서며 그런 불편과 의문은 사라졌다. 이 영화는, 자기 나라에서 도망쳐야 했던 유대인 가족의 일원으로 낯선 아프리카의 가난한 삶에 적응해가며 마침내 그 땅과 문명을 사랑하게 된 한 소녀의 눈을 통해, 사랑과 자유가 가능한 삶의 조건과 방식을 섬세하게 성찰하고 있었다.
그것은 서구 백인의 시각을 벗어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랬다면 더 이상했을 것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우리가 그들이었다면 역시 느꼈을 극히 자연스러운 태도들 - 아주 열린 태도로 아프리카인을 대하지도 않고 전쟁의 본질을 통찰하지도 못하는 - 을 보여주며 아프리카와 유럽 문명의 근본적인 차이점들을 사소한 일상으로부터 이것저것 보여준다.
물이 없으면 우물을 파라고 다그치는 영국인 목장주와 희생제를 통해 케냐산 신령에게 기우(祈雨)하는 아프리카인, 다 큰 소녀는 가슴을 내놓아선 안 된다는 말에 ‘니네 학교는 이상한 걸 가르치네?’ 라던 소년의 대꾸, 집을 떠나 나무 밑에 홀로 누워 죽음을 기다리던 노파에게 호들갑을 떨던 소녀의 어머니...
소위 검은 대륙, 유럽의 식민지 아프리카의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 노력이나 반성은 없다. 이질적이면서도 서로 뒤섞여 들어가는 원주민과 이방인의 삶의 모습. 전쟁 중임에도 아프리카는 여전히 건강해 보이고 그 땅의 원주민의 삶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외부적인 물리력은 크지 않아 보인다. 우열 없이 서로 다른 두 문명 속에서 소녀는 밝고 자유롭게 아프리카의 삶을 사랑하게 된다.
이게 함정이라면 함정이다. 많은 사람들이 토로했고 나 역시 우려했던 불편함의 근원일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아니며, 그들이 누구인지 안다는 것. 그들이 저질러 놓은 행위의 결과인 아프리카의 현실을 호도하는 게 아니냐는 피할 수 없는 질문.
역설적으로 바로 그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어린 레기나의 시선... 아이를 통해 마침내 어른들이 깨달은 것은 검은 아프리카인이 자신들과 다른 사람이 아니며, 그럼에도 자신들의 고향은 아프리카가 아니란 것이었다.
기괴한 권력 담론의 무시무시한 현실화로 스스로를 파괴하던 서구 문명, 물리적 힘에 의한 승리만을 추구하는 남성 문명(결국 아빠도 군복을 입는다)을 그 바탕에서부터 회의하고 거부하게 만드는 힘은 다름 아닌 역사적이고 사회과학적인 엄밀성을 결여한 어린 소녀의 소박한 관점에서 나온다. 그 관점은 자연스럽게 에코 페미니즘(이런 말이 있나?)이라 할 만한 구체적인 현실 비판력으로 이어질 수 있을 듯하다.
영화의 마지막, ‘원숭이보다 가난해서 바나나를 사 주지 못한다’는 예텔의 말에서 우린 어떤 함축을 읽어야 할까? 내 비록 지금은 빈손이지만 ‘나는 너와 다르다’는 서구 백인의 우월감과 타자의식일까? 그러나 그 가난한 원숭이에게 바나나를 건네며 웃던 아프리카 행상 아주머니의 손길은 세상의 진정한 권력관계가 무엇인지 되묻게 한다.
돌아가는 자들의 깨달음은 그 장면에 응고된다. 인종과 문명을 넘어, 이기는 자가 아니라 지는 자, 얻고 뺏는 자보다 베푸는 자가 더 잘 살고 있음을. 삶의 본질은 이기고 지거나 뺏고 뺏기거나 지배하고 지배하는 것 - 이것이 서구 근대문명이 전 지구를 중독시킨 가장 천박한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 이 아니며, 그것은 단지 겉모습일 뿐이란 것을.
그래서 그들의 귀향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 누구나 자신의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의 땅이 빚어낸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희망한다. 아프리카인이고자 한다면 아프리카인이게 해야 하듯이 서구인이고자 한다면 서구인이게 해야 한다. 어떤 아프리카인, 어떤 서구인이냐가 문제이다.
사랑은 살고자 하는 땅에 터전한 삶의 구체성으로부터 온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나와 다른 그의 삶의 방식과 그 삶이 뿌리내린 장소에 공감한다는 뜻이다. 진정 낯선 것을 사랑할 수 있을 때 고향의 의미는 되살아난다.
메뚜기떼를 함께 쫓으며 그들은 비로소 <러브 인 아프리카>란 제목의 이유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지역의 고유명을 넘어가는 울림으로 한 소녀의 유년을 황홀로 물들였던 낯설고도 사랑스런 ‘아프리카’의 의미를...
인종주의, 제국주의, 오리엔탈리즘... 등은 가상이든 실제든 필연적으로 그 대립물을 형성하고 그 관계 속에서 성장하며 현실적 힘으로 구체화한다. 잠시나마 부자유스럽고 불편했던 내 시각 역시 저러한 현실적 힘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 온 것이다. 그들만큼 나도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 관계가 문제인가, 그 속의 나 자신이 문제인가? 그러나 그 관계는 얼마만큼 실제적인가?
아프리카인 오부워의 태도는 오만한 백인에게 되려 굴욕감을 느끼게 만든다. 거기에는 문명의 우열을 넘어 구체적인 삶의 방식이 갖는 어떤 탁월함이 있다. 어떤 이데올로기적 재단이나 권력도 그 앞에선 졸렬해 보인다. (이렇게 말하면, 또 다른 의미의 오리엔탈리즘일까?)
문제는 삶 그 자체, 아니 삶과 죽음을 넘어가는 존재의 경이를 통해 바라보는 삶에 대한 경의와 믿음이다. (이건 공허한 신비주의일까?) 그 단순한 진실 앞에서 편협한 서구인의 우월적 자아는 무너진다. 사랑이 되살아나고 자유가 되돌아오며 고향의 의미가 되새겨진다. 전쟁이 끝나고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원한 이방인이자 이미 아프리카인인 쥐스킨트란 남자, 조금은 그가 부럽다. 세상이 강요하는 고독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 머무르며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그 속에서 그는 최대한 자유롭고자 한다. 일종의 운명애이다.
한때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란 영화라 몹시 못마땅했다. 그러나 강요된 죽음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아들 앞에서 끝까지 유머를 잃지 않는 그 삶의 태도는 인간이 가질 수 있고 또 마땅히 가져야 할 존재에 대한 경의인 동시에 존재의 경이였다. 삶과 인간에 대한 경의가 굳이 한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이 영화가 아프리카에 대한 서구인의 편견을 드러낸 일방적 이해라고 매도할 이유는 없을 듯하다. 우리와 그들(서구인)의 이분법은 그들이 만든 것이지만 우리 역시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거기서 벗어나려는 나름의 노력과 꿈은 누구의 것이든 적절히 평가해 줌이 온당한 태도일 것이다. 현실과 꿈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기에 말이다...
* 영화의 가장 매력적인 면은 아프리카의 풍광이 아니라(오히려 과잉을 배제한 흔적이 역력하다), 어린 레기나(레아 쿠르카)의 연기다. 물론 다른 배우들(특히 오부워)도 뛰어나지만, 레기나는 일급 배우도 혀를 내두를 표정연기를 그 쪼그만 몸에서 거침없이 뽑아낸다. 역시 어린애들이란 영원히 풀지 못할 신비의 하나일까... 녀석을 떠올리기만 해도 절로 즐거워진다.
음악도 훌륭하다. 특히 힘찬 타악 리듬은 이런 류의 영화가 흔히 빠져들기 쉬운 감상을 배제하며 이국정서에 멜로를 버무린 대작 지향의 작품을 확실히 비켜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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