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책

디 아워스 - 시간의 빛 혹은 먼 시선 속으로

by 숲길로 2007. 9. 1.

 

 

영화명 : 디 아워스 (2002)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출연 :

 

The Hours. ‘세월’ 또는 ‘시간들’이라고 해야 할까? 사전은 계절의 여신들을 함께 부르는 이름임을 알려 준다. 각기 다른 빛깔의 사계가 모이면 세월이 되는가. 세월 혹은 시간이란 또 무엇일까? 

 

제목처럼 시간에 관한 영화다. 타인의 시간에 겹쳐지는 삶들. 클라리사와 리처드는 버지니아의 작품에, 로라는 리처드의 소설에, 또 버지니아는 로라의 환상 속에 있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시간, 타인의 의식 속에 머무른다. 생애 같은 하루가 세 여자 각각에게 되풀이된다. 그러나 사실 그들 모두는 자신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반복되는 고유함, 그것이 시간의 의미다. 

 

 

       

<디 아워스>는 또한 시선들에 관한 영화다. 버지니아는 홀린 듯 중얼대며 허공을 보며, 침묵하는 로라는 하염없이 창 너머 먼 곳을 응시한다. 그 시선들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죽음 혹은 고통? 다른 곳, 기억 너머의 또 다른 삶? 

그들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이 있다. 로라를 뒤쫓는 아들의 시선, 슬픔에 젖은 버지니아를 뒤돌아보던 조카딸의 시선. (아이들이란 근원으로부터의 어떤 선물이리라. 그들의 눈길은 시원에서 마악 솟아나는 시간 자체인 양 모든 것을 본다).

시선은 시간으로 길을 연다. ‘의식 흐름’ 기법의 영화적 변용의 키워드는 시선이다. 이미지의 예술답게 빛에 충실하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잡으려면 신비롭도록 멍(몽?)한 그녀들의 눈빛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냉정하게 보면, 이 영화는 단지 인상파적인 시간과 빛의 모자이크다. 윤곽을 잃고 빛나는 표면만 있을 뿐, 시선들이 향하는 그 너머는 보이지 않는다.

버지니아는 ‘나는 죽어가고 있는데 ... 그걸 알기조차 하느냐’며 절규한다. 왜 죽어가는지, 로라는 또 왜 저토록 힘들어하는지... 그들의 고통은 모호하다. 들어오라고 매혹하는 눈빛으로 먼 곳을 볼 뿐이다.

들어오면 보이리라? 많이 듣던, 감성의 결을 건드리는 신비한 수법. 좀 거북스럽다. 하나의 사실이 드러난다. 의식흐름 기법의 영화적 변용이라는 참신함에 숨겨진 코드는 뜻밖에도 ‘감성’ 또는 ‘감정이입’이다. 새로우면서도 익숙한 느낌은 그 탓일 게다.

하긴 감독의 전작 <빌리 엘리엇>도 그랬다. 당시 영국의 현실을 가감없이 보여주지만 마침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도약들로 덧없이 흩어지던 것. 담담하게 흔들리다 마침내 출렁이며 파도치던 그 넘의 것! 다 보고 나서도 감을 잡지 못했다. 이거 신파 아냐? 그러나 너무 괜찮네...      

그러나 여기선 형식이 영화를 모호하게 한다. 다른 시간대의 엮어짜기는 맥을 잇는 동시에 끊는다. 너무 많은 눈빛들, 하나이면서 서로 다른 삶이 엇갈려 든다. 감정이입의 초점 잡기는 쉽지 않다.

   

 

 

하루의 시간이 세 여자의 생애를 짠다. 영원한 하루를 흐르는 그 시간이란 의식이다.

하루의 시작은 빛난다. 멋진 피아노 음향에 실려 꽃과 함께 온다. 불과 십여 분만에 ‘꽃’은 세 여자를 하나로 엮는다. 그러나 그건 계산된 연결고리일 뿐, 진정 그들을 이어주는 건 시선이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애초의 질문으로 되돌아 왔다)

시선은 의식이다. 죽음을 바라보는 고통스런 의식이기도 하다. 먼 곳을, 낯선 곳을 보며, 창 너머 남편을 보며 그들은 자신을 본다. (보는 것은 또한 보여짐이다). 버지니아가 본 것을 로라가 본다. 아들이 그녀를 본다. 그녀의 눈길은 수십 년 후 아들의 시선으로 되돌아온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눈으로 본다. 오직 자신으로 죽는다. 반복하면서 고유해진다.

시간은 덧없는 것인가? 사라져 돌아올 수 없는가?

덧없음은 죽음 앞의 유한함이다. 시선이 향하는 죽음으로부터 삶의 시간 - 의식 - 은 흘러나온다. 우리가 죽음을 향해 가는 자가 아니라면 시간이 어디서 나타나 올 수 있으며, 시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흐르는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딘가에 고여 기억이 된다. 첫사랑을 기억하는 리처드. 고임의 자리에는 만남과 헤어짐도 있다. 옛 애인과 딸이 돌아오고 늙은 로라가 돌아오며, 시인이 죽고 파닥이던 작은 새가 숨을 멈춘다. 그래서 시간은 또한 각자의 고유함이 모인 시간들(the hours)이다. 

세 번의 입맞춤, 고통은 그들을 여성 혹은 인간으로 서로 닮게 한다. 클라리스와 로라의 만남, 그녀의 딸과 로라의 만남. 이어지는 만남은 처연하고 아름답다. 나누는 시선의 교감은 깊다. 고통은 그들을 고유하게 한다. 서로를 불러 함께 머물게 한다. 그것이 늙은이와 젊은이의, 가는 자와 오는 자의 만남의 의미이자 역사의 의미가 아닌가.

죽어 돌아가는 곳은 어디일까? 그러나 만남으로 체험하는 각각의 고유함은 반복하며 깊어진다. 만남이 없다면, 만약 우리가 그 머언 응시의 빛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세계는 그저 평면적 인상의 나열만으로 풍성하리라.

마지막 순간, 버지니아는 돌아본다, ‘함께 했던 시간들’을...

영화는 속삭이며 보여준다. 시간은 되풀이되는 의식이며 시선임을. 덧없는 것들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함께 머무르는 흘러감에서, 우리 삶은 저마다의 새로움으로 빛나며 누군가에게 되돌아오고 있음을.


다양한 보기가 열려있는 흥미로운 영화다. 모호한 그러나 빨아들일 듯한 그녀들의 눈빛으로 들어간다면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이 보일까? 여자로 살아가기, 죽음, 사랑 그리고 권태, 허무 따위들.... 

그게 싫다면, 다만 빛의 파편으로 빛나는 시간의 조각들, 영원 같은 하루의 잔해들이 떠도는 모습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덧없으므로 아름다운 모든 것들이 거기 있지 않은가.


  

뱀다리: 좋은 영화임에도, 달드리 감독이 아주 편하진 않다. 살짝 조미료 맛이 난다. 과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