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를 아직도 기억하시는지...?
갈망처럼 깊고 낮게 가던 음악에 실려 느리게 흐르던 이룰 수 없는 사랑. 침묵으로 묻은 한 시절의 빛. 아니, 빛보다 더 빛나던 그림자. 그게 <화양연화>였다. 장만옥과 양조위의 눈빛과 몸짓을 오래오래 기억하게 했던 아름다운 멜로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앙코르와트 사원의 벽을 봉인하고 돌아서던 그 남자가 추억에 사로잡혀 하염없이 떠돌며 빚어내는 또다른 사랑 이야기가 <2046>이다.
‘감출 줄 모르는 자는 사랑할 줄도 모른다.’ 고 했던가?
너무 깊이 감춘 자 역시 사랑하지 못한다. 옛날 사람들은 말 못할 비밀이 있으면 산에 올라 나무에 구멍을 파고 묻었다고 한다. 영원히 닫힌 사랑의 비밀. <2046>은 흐르는 시간 위에 표류하는 영원, 즉 멈춘 시간의 섬이며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을 뜻한다. 나를 둘러싼 모든 이의 시공간이 흘러가도 나만은 흐르지 못하는 섬으로 머물며 꾸는 꿈의 풍경이 <2046>이다.
그러나 봉인된 시간인 사랑은 또한 자꾸만 바스라져 내리는 '시간의 재'이기도 하다. 새로운 사랑이 올 때 이미 어긋난 시간은 가차 없이 흘러간다. 잃어버린 자들은 고통스럽고도 감미로운 상실감에 탐닉하지만 눈을 뜨면 늘 늦다. 그래서 또한 ‘사랑은 타이밍이다.’
2046은 홍콩의 유예된 구체제가 끝나는 해이다. 복제된 현실로라도 영원히 멈추어 있기를 꿈꾸는 자들의 되돌아보는 시선은 현란하지만 공허하기 그지없다. 거기엔 아직도 세기말에 머무르는 누아르풍 허무의 냄새도 묻어 있다. 어쩔 수 없이 왕가위 감독은 홍콩인이다. 그들의 2047 앞에서 망연해 할 뿐이다.
사라진 이미지에 사로잡혀 떠도는 그림자들의 초상을 통해 시간의 의미를 성찰하는 관점은 전작들에서 숱하게 보았기에 더 이상 새로울 게 없고, 느리면서도 일관되고 긴장된 호흡의 깊이감이 일품이었던 <화양연화>에 비해, 역사적 현실의 가장자리와 가상현실의 시공간을 오락가락하는 <2046>은 좀 산만해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감독 특유의 화려하고 색채감 넘치는 영상은 여전히 탐미의 극을 달리고, 개개 배우의 연기를 넘어 인간의 몸이 갖는 표정들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포착하는 치밀하고 성찰적인 연출은 연륜을 느끼게 한다.
장국영이 가버린 지금, 한층 나이 들어 보이지만 눈빛 연기 하나만으로도 더욱 독보적인 양조위와, 나른하고 우아한 목덜미만으로 할 말을 다하는 장만옥.
요염과 쓸쓸함을 함께 담아내는 장쯔이는 절정의 연기를 보인다. 자신을 뿌리치고 돌아서는 양조위의 뒷모습을 향하던 그녀의 손. 우리 몸에서 가장 섬세하고 연약하여 쉽게 상처받는 그 손은 감출 길 없는 갈망을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 이상으로 한 인간의 모든 내면을 표현한다.
장쯔이보다 더 아름답던 왕페이. 그녀의 몸짓과 표정들은 하나하나가 작품이다. 연인과 함께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는 마음의 절실함을 그지없이 아름답게 드러내던 발놀림, 거기로 흘러내리던 애틋한 중얼거림들...
검은 장갑을 낀 채 흔들리지 않으려는 듯 정면을 응시하며 걸어가던 공리의 옆모습에는 <아비정전>의 한 장면이 겹쳐진다. 얼굴조차 보지 못한 어머니를 등지고 걸어가던, 푸르름 속으로 빨려들며 슬로모션으로 차츰 발걸음이 느려지던 아비의 뒷모습...
영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전작들을 불러온다. 기다림과 엇갈림을 교직하며 흘러가는 시간의 이미지도 낯설지 않다. 유가령(루루)은 아비의 이미지와 겹치고 공리(수리첸)는 화양연화의 장만옥을 불러온다. 왕페이 역시 중경삼림의 그녀를 닮았다. 그러나 겹쳐지며 솟아나는 새로운 이미지들은 더 깊고 풍부하며 정교하다.
지나치리만치 아름다운 이미지들로 넘쳐나는 이 영화는 마치 사랑의 본질이 닫힌 시간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불가능한 사랑에 빠진 자의 유일한 현실은 고통이지만 그것이 우리 앞에 드러나는 방식은 더없는 아름다움이기에 말이다.
<화양연화> 못지않은 음악도 일품이다. o.s.t를 사고 싶을 정도다. 흐느끼는 듯한 현악 선율, 기존 곡을 멋들어지게 살린 재즈풍 보컬과 아리아 <카스타 디바> 등은 정말 잘 어울린다.
이래저래 모처럼의 진수성찬인 양 반가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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