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 신기록의 비결이 궁금했으나 결국 비디오로 본 영화다.
잘 포장된 한 편의 신파. 난데없이 쥐어짜는 끝부분과 건달 문법 특유의 뜬금없이 튀는 몇 제스처나 대사를 제외하면 포장 솜씨는 훌륭했다. 문제는 그 솜씨가 사실성을 가장한 정치적 수사이며 서사를 가장한 서정이란 거다. <친구>는 패거리의 정치학이다. 친구의 얘기는 건달의 법칙으로 간다.
기억이 서사라면 추억은 서정이다. 기억이 현재의 좋고 싫음, 가치판단에 연루된 사실주의라면 추억은 초현실주의다. 영화의 서두가 밝히듯, 추억은 베일에 가린, 그 때문에 더욱 분명한 ‘갈 수 없는 섬’이다. 걸러지고 응고된 추억은 물리적 시공간의 거리에 있지 않다. 현실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린 기억. 맥락을 잃은 필름조각처럼 추억은 기억에서 유리되어 떠돈다. 꿈처럼 자유롭다. 현재로의 통로를 잃어버렸으면서도 추억은 블랙홀처럼 일방적으로 현재의 시간을 삼킨다. 현실은 추억의 발언에 대해 전혀 합리적으로 소통하거나 대응할 방법이 없다. 추억은 아름답지만 위험할 수 있다. 특히 그 코드가 ‘아무래도 좋다’일 때는.
영화는 네 친구가 함께한 성장기와 각기 다른 삶을 하나의 문법으로 꿰려 한다. ‘친구(의 의리)’라는 코드 자체는 좋다. 그러나 그걸 유아(唯我)적 세계 이해의 만능키로 구사하면 결과는 참담하다. 질리도록 뛰어난 유오성의 연기와 불량끼 넘치는 장동건의 흰자위가 실패를 도왔다면 이상한 역설일까? 그 뛰어난 연기들을 차라리 왕년의 홍콩 누아르풍 허무로 끌고 갔다면 더 나았겠다. 기억의 서사였으면 좋았을 영화가 물귀신같은 친구의 의리에 발목잡혀 추억의 서정으로 향하며 신파가 되었다.
유아적 세계 해석의 중심에 건달의 관점이 있다. 배잡고 뒤집어질 대사처럼 건달은 ’음지에서 살며 양지를 빛내야‘ 한다. 아무렴, 양지 없는 음지는 없다. 그런데 영화는 음지에서 양지도, 음지에서 음지도, 양지에서 음지를 보는 것도 아니다. 오직, 친구만을 본다. 친구의 삶을 보는 게 아니라 ‘친구’라는 이데올로기를 보고 그 이데올로기를 통해 음지를 본다. 음양을 하나로 꿰는 저 심오함. 주역이 무색하다.
‘친구’의 세계는 네 친구와 극히 가까운 근경들만으로 이루어진 불구의 세계다. 당시 우리가 살던 세상의 먼 풍경들인 나머지 세계는 작위적으로 뭉뚱그려진 친구들의 모습에 녹아있다는 뜻인가? ‘그 친구’를 통해 세상의 모습이 풀려 나올까?
친구들의 성장기는 차츰 건달‘만’의 세계로 된다. 말끝마다 달라붙는 ‘친구야!’는 멀어지는 거리를 반증한다. 그건 음지의 불안을 씻어내기에 충분히 약발있는 이데올로기이지만 ‘그 친구’들의 경우일 뿐이다. 뛰어난 연기가 오히려 실패에 기여했다는 뜻은 바로 이런 과장된 허위의식의 요구조차 너무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엉터리 대사에선 좀 서툴렀으면 좋았을 걸...
학교 시절과 조폭 세계에 대한 묘사는 사실적이다. 돋보인다. 우정의 밑바닥에 갈등하며 잠복하는 권력과 획득물 배분의 위계, 선망과 질시... 한국사회에서 또래집단이 나누는 우정은 권력을 이해하고 체득하는 첫 관문이다. 학교는 지식 이상으로 처세도 가르친다. 지배와 복종은 현실에서 추상한 효율적인 조직 구성 원리이자 삶의 기술이다.
두 사내 사이에 표류하는 ‘친구’는 잠시 조폭세계에 빈틈을 내는 듯하다. 은근히 ‘친구’는 정치학이 아니라고 을러댄다. 그러나 바로 그 부정이 ‘친구’의 정치학을 완성하며 친구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친구에 의해 죽어가며 ‘고마해라, 마이 뭇다 아이가’라고 읊조리는 장동건은 과연 빼어난 누아르의 주인공이다. 그쯤서 영화가 방향을 틀었어도 좋았을 텐데.
친구의 죽음과 함께 친구의 이데올로기도 죽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죽어가던 이데올로기는 죽음을 통해 부활하며 신파조의 감동을 겨냥한다. 더 이상 죽을 육신을 가진 친구는 없다. 삶이 박탈당한 곳에 ‘친구’란 이데올로기가 놓여 살인을 대속한다. 평정 속에서 유형을 떠난다. 지배-복종의 조폭원리와 친구의 이데올로기는 그의 관념 속에서 고고하게 합일한다. 건달의 법칙과 친구의 의리는 둘이 아니다. 음양이 하나되고 대립물이 통일된다. 대상의 말살, 흡수를 통해서 온전해지는 친구의 이데올로기는 그렇게 정치적 임무를 완수한다.
영화를 보기 전 ‘친구’ 신드롬만 보고 저 이상한 집단무의식의 정체가 몹시 궁금했었다. ‘갈 수 없는 섬’이란, 분열된 두뇌의 명령으로 가슴에 묻은 부재의 섬이다. 갈 수 없는 거리가 섬의 부재를 정의하는 동시에 실재의 신비를 만든다. 부재하면서 현존하는 기억의 섬, 그게 추억이다.
어쩌면 ‘친구’라고 하는 극히 주관적인 관념이 이미 하나의 부재를 은유하고 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부재 그 자체에 순수하게 관념적으로 집착한다. 소외라 불러 마땅한 그건 일종의 망상이 아닐까?
뒤틀린 이데올로기 혹은 정서의 편향은 지나치다. 경상도 사투리가 낯설지 않고, 알만한 시절 얘기라 재미있게 볼 수 있었는데 아쉽다. 마지막 감옥 부분은 정말 갈 데까지 간다. 눈뜨고 보기 힘들다. 괜찮은 소재, 에피소드를 다듬는 솜씨와 영상, 그것들과 현저하게 불균형을 이루는 전체적인 망가짐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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