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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책

메멘토 - 기억, 끝없는 죽음의 변주

by 숲길로 2007. 9. 1.

 

 영화명 : 메멘토 (2000)
감독 :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

 

결말을 알고 보면 무슨 재미냐고? 그러나 십분마다 토막나는 기억더미에 무슨 결말이 있을까? 시작과 끝은 서로 꼬리를 물고 돈다. 기억손실증은 전염한다. 십분마다 지워지는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우린 같은 증세를 느낀다. 토막토막 잘려진 한 무더기의 퍼즐들을 짜 맞추려 허둥댄다. 그와 관객이 한 편이 되고, 그를 둘러싼 남녀들과 시간이 한편이 되어 숨바꼭질을 한다. 누가 이길까?

유일한 단서는 손실 없는 명제. 기억은 해석이고 배반이다. 오직 사실만 믿어라!


뭐가 사실(fact)일까? 믿으므로 사실인가, 사실이므로 믿을까? '눈을 감는다고 세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가진 십 분의 기억 밖에 있는 현실은 기록되지 않으면 부정된다. 기억은 해석을 향해 열리지만 그가 새기는 문신과 기록은 사실을 봉인한다. 봉인되고 멈춘 사실은 세계를 불멸케 한다. 기억으로 침몰하지 않고 시간으로 소멸해가지 않는 세계의 현재성을 보여준다.

'그의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적는 순간 그는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의 덫에 갇힌다. 그가 도망칠 진실의 영역은 없다. 기억의 바다에 떠 있는 사실의 섬은 믿음 위에 닻을 내린다. 사실은 ‘봉인된 믿음’이다. 그러나 믿음이란 믿을 만할까?

관점과 시간 흐름의 방향에 따른 흑백과 컬러의 대비는 표현력을 극대화하며 가장 멀리 있는 듯하던 기억과 사실을 서서히 접근시킨다. 최초 아니 최후의 순간, 기억의 전복과 확신은 교차한다. 어이없는 살인과 치밀한 복수가 가장 멀리서부터 동일한 시공간에서 만난다. 기억과 사실의 경계가 무너지며, 그는 실패하는 동시에 성공한다. 영화의 처음과 끝의 만남은 참혹하도록 아름답다.

영화의 아름다움은 단순하고 현란한 형식만이 아니다. 원작 제목(memento mori)이 뜻하는 죽음 깃든 덧없는 삶은 서양 중세이래 다양하게 변주된 진부한 주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기억에 관한 치밀한 퍼즐게임이다. 죽음의 기억으로 울려 퍼지는 기막히게 참신한 현대적 변주다.

 

 

죽음은 어디에...?

'내가 지금 무얼 하는 거지?' '내가 왜 여기에 있지?' 극적인 순간마다 그는 죽고(잊고) 다시 태어난다(깨어난다). 다시 시작할 때마다 아내의 죽음은 복원된다. 사실의 자격을 갖춘 유일한 기억인 그것은 더 이상 고유한 죽음이 아니다. 겹쳐지며 죽음 일반이 되어 단절된 기억의 사이사이에 박힌다. 십 분의 지속만을 갖는 그의 투명한(?) 삶은 중첩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다. 무게는 수많은 중심으로 분산되며 가혹하게 타인의 삶 위로 이동한다. 부재하는 동시에 현존하는 하나의 죽음은, 모든 죽음과 재생의 원천이 되어 마침내 관객을 끌어안고 뛰어드는 덫이 된다.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는 삶은 명백히 불사(不死)의 은유며, 망각은 죽음의 다른 모습이다. 부단히 기억을 새롭게 하고 사실들을 끌어 모으는 체계적인 정보화의 강박관념. 낯설지 않다. 그러나 불사에 대한 오랜 꿈과 욕망의 우화는 비틀림 그 자체다.

'사실'이 그를 구원하는가? 봉인된 매 사실의 힘으로 그는 새로운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러나 사실은 ‘봉인된 믿음’일 뿐이다. 해석이며 배반인 기억을 향해 사실은 끊임없이 투항하며 스며든다. 죽은 기억이 산 기억을 빨아들여 서서히 하나의 빛깔로 세상을 물들인다. 사라지는 모든 현재의 기억과 시간은 어딘가에 머문다. 시간 저편에 정박한 죽음은 이 곳의 또 다른 죽음을 삼키며 자라난다. 모든 것을 삼킨 기억의 심연은 다시 스스로를 재구성한다.

그것이 죽음(mori)을 감춘 기억(memento)의 정의다. 기억은 더 이상 실존의 증거가 아니며, 죽음 또한 삶의 일부가 아니다. 단지 회피하고 싶은 절대적 타자다. 죽음이 산 기억을 지배하지만 더 이상 삶에 속하지 않는다는 관념은 얼마나 현대적인가.    

'기억이 자아 또는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보증'이라는 신화는 수상쩍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기억하지 않으면 죽는다'로 변조된다. 그러나 기억은 죽음을 부른다.

‘사실’ 또한 신비적인 허구다. 불사를 꿈꾸는 자들은 오늘도 여전히 정보의 이름으로 매 순간 기억을 재프로그래밍하여 사실을 생산한다.


그러나... 기억에 의존해 기억에 관한 영화를 얘기해도 되는 걸까? 누구를, 무엇을 '해석하고 배반'하려고? 늘 새로워지는 주인공처럼 나도 처음으로 돌아가 침묵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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