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메아리
금빛 들판 위로 쏟아지는 햇살, 그늘 한 점 없는 평온함. 어둠은 바로 거기 있었고, 주검을 숨기는 빛과 어둠의 공모 사이에서 목소리는 되돌아온다. 메아리는 발언과 말 사라짐의 한 독특한 방식이다. 말이 사라진 곳에 폭력은 범람한다.
사라진 말은 메아리로 되돌아온다. 마지막 장면, 여자아이의 입을 통해 되돌아오는 말에서 우린 피할 수 없는 공범의식을 느낀다. 아이의 얼굴 위로 오버랩하는 무수한 피해자의 지워진 얼굴들을 본다. 살인은 추억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추억이란 불멸하는 기억, 되돌아오는 현실일 것이다.
영화의 끝장면을 시작으로 삼았다면 진짜 ‘추억’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끝에 머물며 시작으로 되돌아가는 추억은 스스로를 닫으며 불온하고 음란한 기억으로 되살아난다. 지평선을 흔드는 바람, 어두운 기억을 품은 대기는 여전히 빛나고 따뜻하다.
영화는 ‘추억’의 통로를 따라 시작과 끝이 맞물리는 구조다. 극장을 나서면 들판은 사라지고 푸르름 대신 잿빛 건물들이 미로를 연다. 우린 닫힌 길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시대극이 아니다. 지나간 한 시대의 풍경이 아니라 완결되지 못한 역사의 갈피를 찬찬히 더듬으며 어슬렁거린다. 눈물 날만큼 웃기고 답답하게.
2. 자연, 폭력, 침묵
비와 바람 그리고 밤. 이 서정적 자연들이 어째서 그토록 폭력적이 되었을까? 자연의 무표정에 투사되는 인간의 불안과 욕망... 거기서 빚어지는 깊고 어두운 세상의 그늘들.
바람에 일렁이는 풀밭 너머 그로테스크하게 떠오르는 공장의 불빛. 가장 익숙하고 친근하던 풍경은 더 이상 목가적이 아니다. 늘 다니던 숲길은 문득 낯설고 위협적인 공간으로 변해간다. 지척의 거리에서 바라보는 고향마을은 외계보다 아득한 절망의 현장이 된다.
강요된 침묵과 어둠 속에서 범행은 이루어진다. 그는 지켜본다, 사이렌이 울리면 불빛이 하나 둘 꺼지고 세상은 침묵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밤의 어둠은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폭력의 얼굴이고 범행을 방조하는 고개 숙인 공범들의 은신처였다. 질식할 듯한 절망과 공포 위에서 피어나는 가학을 방조하고 완성하는 것은 묵묵히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우리 침묵들이었다.
3. 광기
미쳐버린 자만이 진실을 보았지만 진실을 독점하려는 이성은 광기의 발언을 믿지 않는다. 그 발언이 침묵해 버렸을 때 남은 자도 미쳐간다. 광기에 귀 기울임으로써 비로소 진실을 듣고 범인의 한 얼굴을 대면하게 되는 역설적 상황은 흥미롭다.
그러나 ‘추억’은 망각을 위함이기도 하다. 우리 자신들의 얼굴 속으로 숨은 범인은 이미 지워진 얼굴이다. 사라진 그는 이미 ‘누구나’이다. 송강호, 김상경 기타 등등일 수도 있다. 광기와 폭력으로 얼굴은 서로 닮아간다.
모든 것을 침묵시키는 속도와 소음의 폭력인 기관차. 합리적 의사소통을 잃어버리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이성의 탈출로가 광기였다면, 기관차는 그 광기의 진실조차 침묵시키는 절대 폭력의 은유로 등장한다. 혹시 우리가 그 승객 중 하나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4. 우리들 중 하나.
그는 어둠 속으로 비틀거리며 사라진다. 그가 사라진 곳은 어디일까? 그가 왔던 어둠 혹은 ‘나는 결코 당하지 않을 거야‘라고 외치던 모든 무고한 피해자들의 무리 속일까? 그러나 그는 되돌아온다. 새로운 얼굴 위로,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사건이 사라져버린 추억으로부터 되돌아올 것이다.
가해자와 무고한 혐의자란 두 얼굴의 사내, 가면에 가까운 무표정 연기는 압권이다. 눈빛은 거의 읽히지 않는다. 무기물이나 어떤 짐승의 그것처럼, 너무 투명하거나 검게 빛나서 도무지 시선이라고 할 수도 없고, 감정을 드러내는 표정의 중요한 일부라고 할 수도 없는 눈빛이다. <질투는 나의 힘>에서 느낀 박해일의 수수께끼를 다시금 본다.
5. 진혼 없는 부채의식
피해자는 있어도 가해자는 없는 폭력이 일상이던 시절, 그게 역사라고 강변하던 시대. 누가 그 시대를 가책 없이 살아낼 수 있었으랴만, 그럼에도 <살인의 추억>은 살아남은 자들의 은밀한 부채의식을 불러낸다. 시간은 충분히 흘러갔고 세상은 많이 달라진 것일까? 얼마나 더 자유로워졌을까...?
역사의 풍요와 빈곤을 함께 말할 수 있다면, 그 모두는 고스란히 저 시대를 건너온 우리 모두의 기억이 진 빚일 터이지만 그 빚은 아직 탕감되지 않았다. 금빛 들판을 유린하며 말없는 폭력이 범람하던 그 날의 공장들은 지금도 주야 없이 불 밝히고 있고, 얼굴 없는 범인은 그 날의 현장을 기웃거린다. 숨죽인 풀밭 위를 일렁이는 대기는 아직도 불온하다. 불온과 음란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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