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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책

박하사탕 - 과거 속의 미래

by 숲길로 2007. 9. 1.

 

 

영화명 : 박하사탕 (1999)
감독 : 이창동

출연 :

 

하나의 가정에서 시작해 보자.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모든 결과가 원인 속에 이미 들어있다면?

원인은 시작인 동시에 과정이며 끝이다. 그러므로 지금과 다른 결과를 원한다면 우리는 현재와 과거를 거슬러 원인 이전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맨 처음보다 이전에 섰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버린 미래를 꿈에서 본 듯 어렴풋이 기억해 내고, 그 햇살 아래 다시 설 수 있을 것이다.

운명의 그녀를 만나던 젊던 그 날, 철교 아래 누워 쏟아지는 햇살로 떠올린 먼 미래의 기억. 오지 않은 그 날들은 실현되지 않은 이야기들로 출렁인다. 맺혀오는 눈물 한 방울에 담겨오는 살아야 할 날들의 넉넉함이란....

그러나 바로 거기서,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지금을 다시 살 수 있다면, 희미한 기억 속에 담긴 미래가 실처럼 풀려 나올까? 우연으로 점철된 필연의 연쇄에 묶인 삶이 반복되며 세상은 다시 한번 되돌아올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자유란 무엇일까?


영화는 화면 가운데 떠오르는 하얀 점 하나에서 시작한다. 모든 이야기는 그 점에 담겨 있고 마침내 그 점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아니, 끝은 없다. 다시 시작할 뿐이다). 그것은 빛이었다. 멈추지 않는 시간을 달리는 지금, 깜깜한 터널의 끝에서 햇살 아래 하나하나의 분별로 떠오르는 바깥 세상은 폐쇄회로 속에 잠긴 과거의 세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건 빛이다. 모든 현재가 그 속에 담겨 한 점 빛으로 응축되었다가 무한한 시간과 공간으로 풀려나는 것이라면, 지금 이 순간의 구원도 과거 속에, 그 회귀의 빛 속에 있을 수밖에. 터널을 벗어나 그 빛 속으로 들어감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비롯되었던 시초의 너머를 향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은 미리 마련된 프로그램의 전개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필연적인 어떤 것이다. 하나의 점이 시공간 속으로 스스로를 풀어놓기 시작했을 때 그(영호)의 삶은 이미 내던져진 것이었다. 규정하는 것과 규정되는 것은 다르지 않다. 그는 바로 그 곳에서 모든 것을 뺏겨야 했고 모든 것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자신의 것이면서도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 삶을 살았다.

무엇 때문에? 왜 그는, 아니 우리는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그를 망친 것은 누구였을까?

아무도 대답이 없다. 우리 하나하나도 그때 바로 그곳에 그와 함께 있었으면서도...

어둠을 가르며 날아든 빛보다 빠른 총탄 하나가 그의 뒤꿈치에 머무른 심장에 박혔을 때, 우리는 그와 함께 죽었어야 했다. 유예된 삶은 더 이상 누구의 것도 아니다. 자신의 심장과 그의 첫사랑을 함께 쏘았던 그 총탄은 바로 그가 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흐른다. 미래에서 과거로. 아니,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것일까? 그러나 더 이상 현재는 없다. 그래서 시간은 거슬러 흘러야 한다.

그는 돌아가고 싶다. 응축된 한 점의 빛, 80년 광주를 거슬러 첫사랑에게로.

시간은 달리 흐를 수 없다. 그는 자유롭고자 한다. 무심히 날았던 한발의 총탄에 깃든 우연 혹은 운명으로부터. 그 우연에 맺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 전부를 향하여 기차처럼 달려들려 한다. 한 사내의 생애로 응고된 주인 없는 불모의 모든 시간들도 이제는 되돌려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것이었다면 모든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로... 그것이 가능할까?

회귀는 소멸이 아니다.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애초의 하나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에게 그 날의 광주는 빛의 시작이요 끝이다. 모든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곳에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