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베토벤 소나타가 쓰였다는 얘길 우연히 라디오에서 듣고 비디오로 본 영화다. 쓸쓸한 감미로움을 지닌 단순한 무언가풍의 안단테 선율로 한 남자의 짓눌린 착잡함을 끝없이 이어가는 솜씨는 일품이었다.
마지막 장면. 조등 하나가 여자의 시선을 끌며 천천히 밤하늘로 오른다. 남자는 망연히 아이와 마주앉아 있다. 닫힌 곳에서 벗어나기...
<큐브>가 떠오른다. <큐브>의 닫힌 공간은 조립되고 구축된 요소들이 빚어내는 효과다. 체계 스스로의 변형과 재구성을 능가하는 속도로 구성요소를 환원, 해체할 때 큐브는 빛을 향해 열린다. 그 열림은 대상의 작용력에 사로잡히지 않는 유연함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기존의 자리를 뺏긴 자들이 더욱 어둡고 닫힌 곳으로 물러날 뿐이다. 이 시대 삶의 양식을 가장 잘 담아내고 있는 오피스텔과 고층 아파트, 자동차의 공통점은 무얼까? 그 구조물들이 가진 자학적인, 불멸의 폐쇄성, 무차별의 숨 막히는 생존 투쟁의 공간...
벗어나기란 과연 가능할까?
공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999년 서울 한 고층 아파트와 오피스텔, 이름 없는 임의의 점들이다. 좌표만으로 공간이 만들어지진 않는다. 질점들의 운동으로 비로소 공간은 생겨난다.
그녀는 오피스텔로 애인을 방문한다. 똑같이 생긴 모든 문들은 닫혀있다. 좁은 복도에서 한 여자가 스쳐간다. 애인의 방에서 나온 게 아닐까? 그녀는 그 문들 중 하나와 익명으로 관계한다. 닫힌 문 너머 그가 없다면 문도 없다. 그의 품에 안기기 전까지 그녀도 거기에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의 공간에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 그에게 머무르면서도 사로잡히고 싶지 않은 모순된 바램이 그녀를 달뜨게 한다. 그와의 정사는 늘 격렬하다, 일순 덧없이 엉켰다 달아나는 바람이나 빛처럼. 그 운동으로만 그에게 있고, 그를 통해서만 거기에 자신의 자리를 만든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동시에 숨기는 그녀는 무언가를 닮았다.
자기모순으로 떠도는 그녀와 달리 남자는 한 곳에 사로잡혀 있다. 그녀를 통해서만 세상이 열린다고 여기며 그녀의 흔적에 매달린다. 그러나 탈출구여야 할 그녀에 의해 그는 아직 거기에 있다. 그를 가둔 것은 그녀다.
그녀의 남편. 실직은 가족을 포함한 모든 관계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잃고 대상으로 전락했음을 뜻한다. 아내의 불륜을 알아채고 아이의 아비가 누군지 의심스러워지면서 집조차 더 이상 그의 자리가 아니다. 그는 자리를 뺏기고 가족과 사회로부터 잊혀질 위험에 놓인다.
아내와 정부가 차지한 집에서 쫓겨나 있던 바로 그 시간, 자신이 속한 장소라 믿었던 곳에서 체험하는 부재감. 침묵처럼 슈베르트의 트리오가 흐른다. 시간은 무한 공간이 된다. 엄습하는 압박감, 격렬히 발버둥치는 건 바로 여자다. 압박의 리듬은 남편과 정부 사이를, 남편과 아이 사이를 느리게 흐른다.
그녀는 묶이기를 거부한다. 그녀는 두 남자 사이를 오가는 끊임없는 운동이다. 거리는 자신의 존재 증명이자 현실의 부피다. 운동의 정지, 거리의 소멸은 곧 죽음이다. 활발한 운동이 더 큰 공간을 만들며 그녀를 더 살아있게 한다. 그녀의 마술같은 움직임이 구성해내는 허공들...
눈길과 손길 닿는 모든 것이 원하는 거리에서 원하는 모습으로 있기를 바라는 것, 매우 근대적이고 주체적이다. 모든 것은 내 욕망의 대상이다. 그녀는 세상과 맺어나가는 관계 하나하나를 사물화한다. 남편은 세상과 가족의 분업체계에, 애인은 사랑이란 정서와 들뜬 욕망의 대상으로.
그런 관계 속에서만 그녀는 자유다. 모든 곳에 관계하는 그녀는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지상의 모든 수평운동들은 그녀를 더욱 옭아맬 따름이다. 오피스텔 복도처럼 깊게 얽힌 미궁의 통로들.
열린 방향은 둘이다. 발아래 아득한 잿빛 콘크리트 대지와 사방 마주보는 건물들 사이로 간신히 열린 푸르름. 수평을 부정하는 준열한 수직의 운동만이 벗어날 길이다.
<큐브>의 탈주전략은 자신의 표면과 내부에 문명의 이름으로 각인된 모든 코드를 지우고, 대상에 포착되지 않는 유연함에 자신을 열어 맡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는 살아있는 것들이 만드는 운동량에 따라 달라지는 투쟁 공간이다. 스스로를 열거나 바꿀 수 없는 자들끼리 타인을 밀어내고 배타적으로 차지해야만 한다. 탈주의 전략 구성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파국의 길, 그물을 찢고 자유낙하하거나 그 탄성으로 수직으로 솟아오르거나. 닫힌 공간을 열거나 해체함이 아니라 스스로 사라질 수 있을 따름이다. 밤하늘로 오르는 조등처럼...
세 질점이 빚어내는 역학은 필시 참담하다. 모순된 욕망의 파장은 그녀가 면밀하게 배치한 공간 구획을 뒤흔든다. 정물이 반란한다. 닫힌 곳에서 달려온 남자가 그녀로 통하는 길을 찢는다. 여자는 거리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린다. 침묵과 폭력, 점유와 배제는 동전의 양면이다. 등거리에서 긴장을 유지하던 공간들이 겹쳐지며 마침내 하나의 닫힌 공간을 빚는다. 부정된 정체성과 권리를 되찾고 찢어진 공간을 복구하기 위해 치밀하고 단호한 최후의 반격이 시작된다.
요소들을 수렴되고 재구성되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감금과 질서의 공간으로 돌아온 두 남자와 달아나버린 한 여자. 거칠고 극적인 방식으로 안팎의 적을 물리치고 가족의 공간은 탈환되었다. 아이와 그는 고층아파트, 자신을 부정했던 사회의 한 틈에 웅크린다. 쫓겨날 위기를 뒤집고 되돌아 왔다.
그녀는...? 어쨌든 벗어났다. 몸을 포기하고 푸른 밤하늘로 스며들어 버렸다. 두 남자가 확보한 공간이 원한 바가 아니듯 그녀의 탈출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충분히 빛나는 성공 - 해피 엔드 - 이라 해도 좋지 않을까? 최후의 순간, 자신을 사로잡고 가두려 했던 모든 곳, 모든 바램들, 자신의 고단한 욕망으로부터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을 그녀는 찾았을 터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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