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명 : 무간도 (2002)
감독 : 맥조휘, 유위강
고통은 오래 지속된다. 아니, 고통은 영원하다.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홍콩 반환이 1997년이었던가? 육 년 남짓한 지금, 얼굴을 뺏겼다고 뇌까리며 정체성을 자문하는 자들의 표정은 냉소로 일그러져 있다. 솔직히 너무 이른 게 아닌가 싶어 조금 껄끄럽다. 그러나 일전에 본 중화의 자아도취적 문화교실 <영웅>을 떠올리면 껄끄러움은 실소가 되거나 되돌려 주고 싶은 냉소가 된다. 치기 어린 도취의 환각이나 영원히 끝나지 않을 자신의 고통을 망상하며 차게 웃는 일이나 부질없긴 마찬가지일 터.
헐리웃으로 날아간 오우삼 감독의 <페이스 오프>란 영화, 비슷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떠나온 자의 현실감 부족 탓이었을까? 평소 노는 꼴을 보면 도무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라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듯한 미국애들하고 만든 거라서일까? 흥미롭긴 했지만 피상적이란 느낌이었다. 그 <페이스 오프>를 이 영화는 단숨에 뛰어넘는다. ‘이런 건 말이야, 이렇게 푸는 거야’ 훈수라도 하듯...
홍콩발 <무간도(無間道)>. 제목만큼 멋진, 잘 만든 영화다.
감독의 개성보다 끝까지 흐트러짐 없는 구성과 묵직한 깊이의 시나리오, 할말을 잃게 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더욱 빛난다. 아니, 심연 그 자체인 양조위의 망연한 표정 속에 끝없이 이어질 - 無間 - 영화의 모든 서사와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해야 할까.
정체성 상실의 출구 없는 - 근거 없으므로 출구도 없다 - 강박에 시달리며, 허무 혹은 불안이란 화두를 품고 과잉된 비장미를 펄럭이던 동어반복의 롱코트는 사라졌다. 한동안 뜸했다. 그러나 그간 변함 없는 망상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여전히 ‘나는 누구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독백한다. 누아르의 검은 피를 물려받는 친아들임을 입증하며 <무간도>는 2003 버전으로 대답한다. 나는 너라고... 검게 웃는다.
고통의 겉모습은 단순하다.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란 것. 나의 적으로 사는 것이 곧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라는 혼란스런 상황이 고통이다. 그러나 그건 지옥에 이르는 문일 뿐이다. 영원한 고통을 뜻하는 무간지옥은 역설로 성립한다. 고통을 영원하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고통을 벗어나려는 ‘스스로의 선택’이다. 자기부정은 다시 부정되어야 한다. 벗어나려는 집착 자체가 무간지옥의 진정한 뜻이라고 속삭인다.
이건 너무하다. 그럼 대체 현실적으로 해탈 또는 탈출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반전에 반전으로 풀어내는 탄탄한 이야기 솜씨는 이 딜레마에서 단연 돋보인다. 길은 두 가지다. 벗어나려는 집착을 버리든지, 고통의 얼굴인 무표정을 영원히 살아가든지 선택은 자유라고...
영화 최고의 탁월함은 이 양자택일을 연기하는 배역의 몫이다. 유위강 감독은 스타일의 추구보다 배역 선택에 승부를 걸었다.
양조위는 무간도를 들어서며 마주치는 지옥의 표정을 보여준다. 고통은 단지 감각의 격렬함이 아니다. 그건 대다수 인간이 평생 한 번도 겪기 힘든 극한적 실존의 표정이다. 자신을 온전히 잃어버린 자만이, 그럼에도 바로 그 순간의 자신이 누구인지 이해할 수 있는 자 - 그게 인간 아닌가 - 만이 가질 수 있는 표정이다. 영원은 찰나에서 발원한다. 단 한 순간에 그는 지옥의 영원을 본다.
반면, 유덕화는 어떤가. (이 친구, 오랜만에 보니 좀 늙었네). 왕년의 패기 어린 듯 굳은 무표정이 한결 깊어졌다. 그의 연기가 맘에 쏙 들긴 처음이다. 그는 지옥의 영원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나아간다. 잠시 흔들린다. 곧 영원한 고통의 참모습인 집착이 무표정임을 깨닫는다. 포기할 수 없으리란 절망의 끝없는 지속, 그 얼굴이 무표정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침묵한다. 누군가 영원은 인간이나 지상적 사물의 것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게 아니다. 지옥의 영원은 다른 곳이 아니라 지상적 인간의 유한함에 머문다. 불교적으로 말해, 아득한 무명(無明)으로 피어올라 나날이 쌓아 가는 업(業)의 무게와 깊이임을 그들은 안다.
해탈한 자는 누구일까...?
두 영화가 떠오른다. <로드 투 퍼디션>과 <해피 엔드>.
<...퍼디션>은 가족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시선에 어리는 죽음의 그림자를 미국 근대사에 관한 모호한 시각에 투영한 수작이었다. 거기서 가족 또는 자식의 의미란 지칠 수 없는 지옥으로의 고달픈 여정임이 드러난다. 삶은 차라리 빛나는 침묵이며 광기였다(빗속 총격 장면을 보라). 그게 역사를 만드는 거라고 낮은 음성으로 주절댄다(물론 헛소리다). 볼썽사납게 그는 날조된 시간 속으로 해탈한다. 남자인 아버지들의 역사 속으로 말이다.
<해피 엔드>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가족을 버릴 뻔한(버렸나?) 불륜 탓에 남편에게 살해당한 여자는 근대적 폐쇄 공간을 수직으로 벗어나 한 점 불빛으로 떠오른다. 죽은 자는 비로소 자유로워지고 죽인 자는 가족의 공간에 자신을 가둔다.
어떤 점에서 <무간도>는 <해피 엔드>를 닮았다. 무간도의 간(間)이 ‘운신의 폭’이라고 하면 두 영화 모두 삶의 공간에 관한 은유로도 읽힌다. 잃어버린(?)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와, 그 도시 공간의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정체성에 기대어 지옥의 영원을 꿈꾸는 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기에.
그러나 꿈을 바라보는 <무간도>의 시선은 냉소적이다. 뒤집어 보면, 그들이 여태 벗어나지 못하는 콤플렉스가 있다는 것. 지금도 이어지는 검은 웃음이 그 콤플렉스의 한 비밀을 드러낸다면, 그건 차마 내뱉지 못하고 품어왔던 아나키한 어떤 번뇌의 흔적이 아닐까? 식민지의 뿌리를 잊은 아니키즘의 망상...? 이거야말로 내 망상일까?
뭐, 아무래도 좋다. 영화는 훌륭했다. 암시 넉넉한 디테일은 다양한 관점의 영화보기를 열어놓고, 군더더기 없는 영상에 일품연기들로 가득 찬 화면은 빛났다. 서늘한 능청의 보스 아저씨랑 황국장도 낯익은 얼굴이다.
한 번 더 보고 싶은 영화다. 영원에 멈춘 그의 눈빛, 표정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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